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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화원 Jul 08. 2021

하동 일기 水 해거름에 걸린 인간의 향기

나를 찾아가는 여행 에세이 7

  점심식사를 하러 토지주막장터에 도착하자 가을 석양 아래 황금 들판을 품고 있는 그림과 마주친다. 왼쪽에는 부부송, 오른쪽에는 동정호와 악양루가 있고 넉넉한 들판을 끼고 흘러가는 섬진강 위로 서편 지리산 너머 해가 붉게 타오른다. 이 그림은 박경리 선생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악양면 평사리를 떠오르게 한다.

악양중학교 미술부 작품 (2017)
수면같이 아름답고 광활하며 비옥한 땅이다. 그 땅 서편인가? 골격이 굵은 지리산 한 자락이 들어와 있었다.  

지리산이 한과 눈물과 핏빛 수난의 역사적 현장이라면 악양은 풍요를 약속한 이상향(理想鄕)이다. 두 곳이 맞물린 형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가?

      2001년 12월 3일, 『토지』서문, 나남출판사

                    삼삼한 메밀국수          텀블러와 함께 어느 멋진날

  토방 창문으로 연청의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 같다. 해가 사력을 다한 오후 1시반, 서지원의 '내 눈물모아' 멜로디가 잔잔하게 깔린 이 조용한 주막은 도무지 현실감이 없다. 내리쬐는 햇살이 점차 낮아지고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하늘과 나무의 경계가 흐려지는 듯한, 슬로우모션으로 찍는 영화의 한 장면 속에 있다.

 때마침 가져다주신 삼삼한 메밀국수를 먹으며 삼삼한 대나무숲을 눈에 담는다. 같이 나온 쓴 나물이 더위를 잊게 한다. 쓴 맛은 혀 위에서 감돌다 희미한 여운만 남기고 이내 사라져버린다. 인생의 쓴 맛도 단지 그럴 뿐, 이제는 서랍에서 꺼내지 않는 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새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주막 옆으로 발길 닿는 대로 걷다보니 소박한 오두막이 있다. 신발을 벗어놓고 잠시 올라가 저 멀리 평사리 들판을 바라본다. 바람이 좋다. 잠시 앉아서 소설 '토지'를 읽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앉아서 토지 서문부터 다시 읽어본다. 이 서문은 하동 최참판댁 복원 후 열린 <토지 문학제> 행사에 다녀오신 후 쓰신 글이다. 아마 한 말씀 해달라는 부탁으로 연단에 오르신 선생님은 갑자기 토지와 함께 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낱낱이 쏟아내신다. 집으로 돌아오자 26년이란 세월 동안 이 소설의 인물들과 함께 겪었던 충격, 감동, 서러움은 뜬구름 같이,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같이 사라져 버렸고, 오직 인간의 향기만이 남았다고 말씀하신다.

 

인간의 향기


몇 번을 읽어도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지고 만다.

집으로 돌아와서, 지금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토지』에 나오는 인물 같은 평사리마을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주머니, 그리고 아저씨들의 소박하고 따뜻한 인간의 향기뿐 아무것도 없다.



 토지 1부 1권에는 총 5장의 서문이 실려있다. 이 서문에 박경리 선생님이 소설 토지에서 하고픈 말이 압축되어 있다. 형언할 수 없는 무게와 깊이에 부르르 떨렸다. 토지 서문이라도 읽고 하동에 온 것이 참 다행이었다.


  

 언덕길 위에서 토지장터주막을 내려다보니 그 옛날 평사리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주막에서 하룻밤 신세지고 다시 개나리봇짐을 지고 떠나는 나그네마냥 훌훌 길을 나선다. 이 길은 소설 속에 나오는 최참판댁  대나무숲으이어지고, 그 길 끝엔 문학&생명관이 있다. 박경리문학관이 지금의 자리에 들어서기 전, 조촐하게 나마 평사리문학관으로 선생님의 뜻을 전했던 이 곳엔 섬진강을 노래하는 시와 사진이 소박한 액자들에 전시되어 있다. 창작동화대상과 문학상 공모전 포스터가 눈길을 끈다. 그러고보니 어릴 적, 어머니가 주신 안네 프랑크 동화집을 읽고 동화를 쓰곤 했었다. 안네 프랑크가 남몰래 숨어서 쓴 동화. 내 또래가 썼다는 것에 고무되어 나도 모르게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첫 편에 나오는 '아기곰 브라리'라는 동화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아기곰 브라리가 용감하게 집 울타리를 넘어 모험을 떠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짧은 이야기다.

 

  

  한 켠에 쌓여있는 박경리 선생 추모문학제 책자를 한 권 펼쳐서 읽어본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님이 '귀신에 씌인 한 세대의 고독'이라는 제목으로 실은 추도사에서 살아생전 선생님의 음성을 듣는다.

  "요즘 이 소설의 완성에 매달리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 주여'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그리곤 스스로 하느님을 대신하여 '딸아, 참아라'하고 자신을 달랜다."

  선생님의 그 기도, 절실한 외침 속에 신(神)이 있다. 나처럼 선생님도 신(神)을 찾고 계셨구나. 잔잔한 물결이 밀려왔다. 점과 점은 이어지고 지리산과 악양 들판을 잇는 섬진강처럼 이렇게 우리는 만날 수 밖에 없었다.


옛 평사리의 모습
부부송식당      고양이가족

  저녁을 먹으러 부부송 식당에 들러 산채비빔밥 하나를 시켰다. 저물어가는 황금빛 태양처럼 띠를 두르고 마치 노을이 흘러나오는 듯한 계란 후라이가 올려져 있다. 향긋한 죽순과 시원한 콩나물국의 조화가 좋다. 넉넉한 인심의 사장님은 '그렇게 맛있게 잘 먹어주니 좋다'고 기분 좋게 인사해주신다. 밖으로 나와보니 고양이 부부가 새끼를 낳았다. 조그만 새끼 고양이가 엄마 고양이 얼굴에 코를 맞댄 후, 길가에 누워있던 아빠 고양이에게 아장아장 다가가 꼬리를 흔들며 서로 얼굴을 부빈다. 가족의 따뜻한 정(情)에 마음이 따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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