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이런 모습이었으면 했다.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산다면. 앞치마와 잔꽃무늬 두건을 두르고 손수 먹을거리를 마련하고, 커피를 내리고 빵을 굽는 것이다. 마지막 남은 무화과빵과 하동가을밤빵을 한개씩 샀다. 잠시 앉아 버스를 기다리면서 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천연발효 유럽식 빵을 굽는 사장님께 외국에서 살다 오셨는지 여쭤보니 수줍게 웃으시며 그건 아니고 유럽서 빵을 배워오신 분에게 배웠다고 하신다.
평소 이런 빵을 좋아하는 가족들을 위해 선물로 산 것인데 한 두조각 먹다보니 집에 돌아가기 전에 다 먹어버릴 것만 같다. 그 정도로 맛있다! 집 앞에 이런 소담하고 건강한 빵집이 있으면 매일 갈텐데 그저 아쉽다.
"내일 아침에 또 올게요. 그 때 무화과빵 있을까요?"
사장님은 쑥스러운 듯 난감한 웃음을 지으신다.
"발효하는데 시간이 걸려서요. 빵이 다 나오려면 오후 1시 정도일 거예요."
내 의지로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바로 자연이 선물하는 시간. 지금 막 모를 심는 농부와 푸른 논을 바라보고서도 찬찬히 자라는 벼를 기다려주지 못하고, 천천히 부풀어가는 빵을 기다려주지 못하는 마음. 허기진 마음을 채워주는 건 사실 빵이 아니라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이 아닐까.
늦은 오후처럼 그을리고 여물어서 한소끔 열기가 식은 빵은 고소하고 그 안의 무화과는 더욱 달콤하다.
"사장님, 지금 하덕마을 팥이야기 가려고 하거든요.걸어갈까요, 버스를 타는 게 좋을까요?"
"글쎄요 어떻게 하고 싶으실까요~ 걸어가셔도 되고 버스타셔도 되고.. 하고 싶으신 대로 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하하.."
사장님의 쑥스럽지만 묘한 웃음은 마치 체셔의 고양이를 닮았다.
내가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할지 말해줄래?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으냐에 달렸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中
인생의 질문은 다 이와 같은 게 아닐까.
'거기 팥빙수 참 맛있는데...'
사장님의 이 한 마디에 갈까 말까 하는 고민이 쏙 들어가고 지친 다리를 이끌고서 가보기로 한다.
마음 속 답은 정해져 있지만 결국 이런 격려를 얻고 싶었던 것이다.
오후 3:48 최참판댁-하동행 버스
팥이야기에 가려면 '하동수제배파이' 맞은편 정류장에서 하동행을 타야한다. 최참판댁 바로 앞 정류장은 화개행이다. 아까 팥이야기 사장님께 전화했더니 '천천히 걸어도 20분이면 올 수 있어요'라고 하셨다. 그런데 하루 종일 걸었더니 다리가 아프다. 3시48분에 버스가 다가오자 크게 손을 흔들었다. 버스기사님이 '하덕마을? 그건 그냥 요 앞인데..' 하신다. 버스 안에 앉아 계시던 네 명의 동네 어르신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신다.
이곳은 20분 거리는 걸어다니는게 당연한 곳이구나. 두 정거장이면 무조건 버스타고 다녔던 나는 부끄러움이 들어 좀 멋쩍어졌다. 버스가 천천히 출발하고 느릿한 풍경이 하나둘씩 지나간다. 잠시 후, 기사 아저씨께서 백미러로 뒤를 힐끗 보시더니 '하덕마을입니다'라는 안내방송을 틀어주셔서 무사히 내렸다.
하덕마을 입구는 참 아기자기하다. 예술가들이 쓴 마을 커뮤니티 소개가 정겹다.소설 토지의 평사리 마을 사람들처럼 입석리 하덕마을에도 그들이 엮어내는 마을의 역사가 있다.
다시 걸음을 옮기니 저 앞에 드디어 카페 '팥이야기'가 보인다.
팥이야기
오후 4:10 카페 팥이야기
팥 이야기의 클래식한 공간
한 사람이 한땀한땀 소중히 꾸몄을 것 같은 공간, 가구도, 액자도, 방석도, 장식장 안의 본차이나 그리고 앤틱 조명까지 정성스런 마음이 느껴지는 공간, 이런 공간에 오면 마음이 조금 숙연해지기도 한다. 한 사람의 소중한 인생이 깃들어 있어서인지 눈길이 가는 것도 조심스럽다.
팥빙수
손수 끓여만든 팥이다. 팥이 통통하고 실하다. 노란 복숭아를 갈아만든 것 같은 달지않은 복숭아시럽도 올려주신다.
영화 클래식의 마지막 장면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 눈이 보이지 않는 남자 주인공 조승우와 오랫동안 그를 기다렸던 여자, 손예진이 마주 앉은 그 찻집. 그 창가에 흐르는 음악이 여기서도 흐르는 것 같다. 그리운 사람들이, 추억들이 떠오르는 공간, 옛 기억의 잔잔한 그리움이 한 스푼마다 고이고이 마음에 스며드는 것 같다.
팥빙수랑 팥죽 중에 무얼 먹을지 열심히 고민하다 팥빙수를 골랐는데 마지막 한 입을 비우고 나자 팥죽도 먹어야지 싶다. 작은 한 그릇에도 정성이 가득한 곳, 분명 팥죽도 그럴테지. 무엇보다 지금 이 곳을 떠나고 싶지가 않다. 추억을 먹는 듯한 이 순간이 오래도록 계속되었으면 싶다.
그런데 사장님은 먹구름이 몰려온다며 어서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할 것 같다고 만류하신다. 아쉬워하는 내게 '이번만 아니고 또 오실 거잖아'라는 사장님 말씀이 어찌나 위안이 되던지. 그래, 창가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는 팥죽을 만나러 또 와야겠다.
사장님은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하는 내게 '고맙긴 내가 더 고맙지'하신다. 아내 분과 손수 같이 고르고 꾸미셨다는 공간, 이렇게 오래도록 이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추억을 선물했으면 좋겠다.
사장님이 마당까지 나와 알려주신 최참판댁 가는 길은 소박하고 정겨운 농로여서 걷기 좋았다. 할머니들이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시는 정자 맞은편에, 포카리스웨트 광고같은 하얀벽에 파란지붕의 악양교회 옆길로 쭉 올라가면 된다. '왼쪽 오른쪽 길로 가지말고 앞으로만 가세요'라는 사장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네 인생도 그런 것 같다. 때로는 궁금한 호기심과 아름다운 샛길을 마다하고 목적지를 향한 다짐으로 자신을 붙들어 매며 길을 걷는 것이다.
저 너머 평사리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사잇길로 왼쪽엔 옥수수밭, 오른쪽엔 매실나무가 가득하다. 영글어가는 열매만큼 내 마음도 조금 넉넉해진다. 벌써 초여름이다. 걷다보니 평사리의 아침 카페로 올라가는 샛길이 나온다. 다음번 올 땐 최참판댁에 숙박하고 아침에 이 길을 산책하면서 정원이 예쁘다는 '평사리의 아침'에서 식사를 해도 참 좋겠다.
오후5:10 사랑채
뭉치 산채비빔밥
뭉치가 꼬리를 흔들면 자동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되는 곳, 사랑채다. 산채비빔밥을 시키고 밖에 앉아 뭉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잠시 후 벌렁 드러누워 배를 내보이는 뭉치. 배를 한참 쓰다듬어주다 멈추자 얼른 꼬리를 흔들며 가게 문 앞으로 손님을 맞으러 간다. 아주머니가 차려주신 정갈한 산채비빔밥을 순식간에 다 비웠다. 웃으며 잘가라고 인사해주시는데 마음이 참 따뜻해진다. 최참판댁 근처는 6시에 문을 닫는 곳이 많으니 좀 일찍 저녁식사를 하면 좋다.
오후6:30 박경리 문학관 앞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아쉬워 박경리문학관 앞 정원으로 올라갔다. 할머니께서 앉아 계시다가 이 쪽을 보시며 웃으며 손짓을 하신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방긋 웃으며 할머님께 다가갔다. 올해 86세이신 할머니는 말씀도 잘하시고 건강해보이셔서 다행이었다. 김해와 창원에 자식들이 있다고 하신다. 자식들을 기다리는 할머니의 눈 주위는 깊게 패인 주름으로 가득해서 마치 백록담 같았다. 눈물이 고여 영롱한 보석같았다.
'여기 앉아서 보면 탁 트여서 시원햐서 좋아~'
'여기 잠깐 앉았다 가~'
엉겁결에 옆자리에 앉아서 할머니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를 한다기보다는 듣는 쪽이었지만 손짓발짓하며 열심히 할머니 말씀에 추임새를 넣었다.
예전엔 박경리문학관 앞에 큰 평상이 두 개 있어서 마을사람들이 함께 모이곤 했는데, 정원을 조성하면서 평상도 없어지고 코로나로 잘 안모인다고 하신다. 마을 큰 나무 밑에 정자나 평상에 앉아계신 할머님들을 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던데, 오래도록 마을 중심에 정자와 평상이 어르신들의 휴식처로 남아있기를 바란다.
박경리문학관 앞 할머니께서 앉아계시던 의자
고구마 농사를 지어서 자식들에게 보내주어야 하는데 가물어서 큰일이라며 내일 비가 많이 와야할텐데 하신다. 내일 집에 가는데 비가 오면 불편할까봐 걱정했던 나도 덩달아 마른 고구마밭이 신경쓰였다. 비가 많이 와서 할머니 걱정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할머니가 하염없이 바라보는 지리산 풍경 속엔 비구름이, 평사리 들판엔 고구마가 자라고 있다. 그리고 할머니의 마음 속에는 지금도 어린 자식들이 자라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이 작은 의자에 앉아서할머니는그 작은 것들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천천히 오는 버스가, 느릿느릿 구워지는 빵이, 오랜 시간 공들인 팥죽이, 이 작은 마을에서 당신이 와주길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