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걱정하던 마음과 달리, 이른 아침 너무나 아름다운 운무가 산자락에 비단을 드리운 듯하다.
무언가 잊고 있었던 것이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작은 마을 우붓이 떠올랐다. 고갱의 타히티가 그런 곳이었을까. 원시림 계곡에서 수영을 하고 스쿠터를 타고 야자수 사이를 달렸다. 해질녘에는잘란잘란 골목을 걸어 다녔다. 숙소 2층에는 오래된 피아노가 있었는데 '인생의 회전목마'라는 곡을 연습해가서 건반을 두드리고 있으면 청소하시는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일부러 올라와서 듣곤 했었다. 아저씨가 고목나무같이 까맣게 그을린 앞니 빠진 얼굴로 웃으며 말했을 때 못 알아들었지만 기뻤었다. 지금도 그 미소를 생각하면 가슴 한 켠이 따스해진다.
방을 안내해주는 풋풋하고 앳된 소년은 마치 자신의 집에 손님을 초대한 것처럼 무엇이든 다 해주려고 한다.
"비가 올 땐 문 앞에 우산이 있어. 더 궁금한 게 있니?"
"응 넌 이름이 뭐니?"
"난 뿌뚜야. 그런데 마을에는 뿌뚜가 많아. 첫째 아이로 태어나면 아궁 와얀 뿌뚜라고 해. 둘째는 마데 셋째는 꼬망이야."
"그럼 어떻게 구별해?"
"그러게 말이야. 하하하."
너무도 순수한 미소에 도착한 첫날밤 눈물이 났던 곳.잠들기 전눈처럼 하얀 침대에서 나는 울었다. 왜 울었을까. 마음의 빙하가 녹아서 흘러나온물이었을까. 그 물은 참 맑았었다.그래도 그때는 그리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얼마 후 Eat Pray Love라는 영화가 유명해지면서 관광버스에, 너무도 상업화되어가는 거리가 시끌벅적 외로와서 그때를 마지막으로 이별을 고했다.
세상어디에도 이상향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아름다웠던 순간은 노을처럼 사라지고 꿈결 같았던 감정은 강물처럼 흘러가버렸다. 그런데가슴속엔 어렴풋한 알 수 없는 그리움만 남아서다음번 이상향에서 그 본질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끊임없이기대하게된다.
우붓은 그 당시 나의 이상향이었다. 신성함과 예술성이 사람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었던 우붓. 그곳을 정말 사랑했다. 매년 그곳을 찾았던 것은 현지 사람들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미소가 언제나 마음 언저리에 따스하게 남아서 그립고 그리워서였다. 나는 태어나서 그런 미소를 본 적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미소 대신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도시에서 살아가며 마주하는 고객님에 대한 친절은 햇빛을 머금은 먹구름 같다.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일부러 짓는 미소는 참으로 공허하다.
내가 하동 사람들에게 느낀 그것을 '친절'이라고 표현하기엔 어쩐지 내키지 않는다. 낯선 나그네를 저 산등성이를 둘러싼 운무처럼 품어주는 곳. 저 운무는 어쩌면 어젯밤 모든 이들의 마음에 내린 비를 감싸안는 지리산의 미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