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 무렵 어린 시절 어느 날에 일찍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던 큰누나가 퇴근하고 내게 책 한권을 선물했다. 알렉산드라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이었다. 그 책을 읽으며 이야기의 반전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좀 더 자란 뒤 만화책을 읽다가 익숙한 스토리라 가늠해봤더니 그 책에서 차용해온 것을 알게 됐다.
벤허에 묘사됐듯이 죽마고우(竹馬故友)의 목숨 건 우정이 나중에 배신임을 알게 됐을 때 그 마음의 쓰라린 무늬는 지우기가 어렵다. 아파할 생채기 때문에 갈등하다 결국 둘 중 하나가 파국을 맞게 된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친구가 죽어가는 상황에서야 참회하는 말을 쏟아내고, 그때의 극적 비장미는 작품의 정점을 이룬다.
큰누나가 세계문학전집을 사서 집에 두었을 때 세로쓰기로 된 작은 글씨의 그 책들을 나는 내용이나 다 알고 읽었을까.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 같은 작품에서는 전체적인 내용보다 남녀주인공의 러브스토리에 더 관심 갖던 사춘기 소년이었다. 80~90년대 가난했지만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보급은 문화적인 혜택을 향유하게 했고, 잡지와 도서들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우리 집에는 매달 샘터가 우편으로 배달돼왔다. 소설가 최인호는 샘터에 20년 넘게 ‘가족’이라는 에세이를 기고했다. 그는 23살 젊은 나이에 조선일보에 별들의 고향을 연재해 엄청난 인기를 끌며 유명인이 되었다. 나는 법정스님의 글과 이해인 수녀의 시와 에세이도 그 잡지에서 즐겨 읽으며 펜팔친구들에게 문장을 외워두었다가 써먹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교회를 다니면서 나는 신앙생활에 깊숙이 개입해 서울의 신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이후 내가 즐겨보는 책들에는 기독교도서가 많아졌다. 나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주해한 서적들도 즐겨 읽었다. 신앙고백에 다름없는 간증 도서들과 교회역사와 부흥에 대한 책들도 많이 읽었다. 아쉬운 것은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가 짧아 성경주해전집은 대부분 외국신학자들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기독교출판사들이 자체적으로 생겨나 국내의 수많은 필진들이 책의 저자가 되는 길에 도움을 줬다. 황수관 박사의 경우 10년 동안 저술한 책이 팔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방송출연을 계기로 한 순간에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그는 평생에 걸쳐 20여권의 책을 저술했고, 100만권이 넘는 책이 팔려나갔다.
스무 살이 넘었을 때 책을 방문판매하던 아저씨에게 한국문학전집 시리즈를 주문한 나는 끝내 그 할부를 다 갚지 못하고 친구에게 넘기면서 한편으로 많이 아쉬웠다. 또 아쉬운 것은 책을 꾸준하게 계속해 사 모으지 못했다는 것이다. 돈도 모자랐지만 책을 둘 공간도 그만큼 있어야 하니 그 숙제를 풀지 못했다.
이런 찰나에 울산도서관이 지난 달 드디어 문을 열었고,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도서대여증을 발급받았다. 여태 나는 도서관을 거의 이용하지 않았지만 울산도서관의 개관과 맞물려 나는 이제 도서관의 열혈애용자가 돼 보려한다. 인생을 바꾸는 한 권의 책을 만날 때까지.
벤허의 주인공만 아니라 인생극장을 살다보면 사랑과 배신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다니는 것을 알게 된다. ‘각본 없는 인생드라마에 피날레가 멋있어야지’ 가만히 되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