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중고교 사춘기 시절 멜랑꼴리한 감상과 우수에 젖어 취미처럼 일기를 적었다. 문방구나 잡화점에 가면 문방사우(文房四友)를 비롯한 각양각색의 필기구와 노트가 넘쳤고, 크레파스·물감·도화지·습자지 등 원하는 것은 빠짐없이 구비돼 있었다. 시구(詩句)나 명언이 들어있는 그림엽서가 흔했고, 문학에 관심 있는 친구나 여학생에게 보내던 색색의 편지지와 봉투도 다양했다.
나는 친구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비오는 날 우산 없이 비 맞고 걸어가면서 ‘인생이란 무엇인가? 왜 모든 시작에는 끝이라는 게 있어 종결되는가?’ ‘인생을 초월한 절대자는 실재하는가?’ 같은 근원적인 질문을 품고 다녔던 니힐리스트였다. 한편으로 허무주의에만 사로잡힌 것이 아닌 인생에 대한 호기심도 가득해서 펜팔을 통해 부산의 여학생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당시 편지라는 것은 현실을 초월한 또 다른 낭만 가득한 신세계였다.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생긴 습관으로 학교 갔다 오거나 외출했다가 돌아왔을 때 항상 우편함을 먼저 확인하곤 했다. 나는 펜팔 친구인 여학생을 만나러 부산의 연산동에 갔었고, 분식점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저녁 기차를 타고 울산으로 돌아왔다. 그 당시 남구 여천동에는 배가 많이 열리는 과수원이 많았고, 나는 그 마을 끝 안에 까지 걸어가야 우리 가족들이 살고 있는 전셋집에 귀가할 수 있었다.
그곳은 지금 철거된 지 20년도 더 지나 장생포 들어가는 초입의 공단에 편입된 지 오래다. 어느 날 부산에서 어른 두 사람이 찾아와 펜팔친구인 여학생의 이름을 물었다. 두 사람은 연락이 오면 알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되돌아갔다. 나는 펜벗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 후로 더 이상 그 아이의 필체가 담긴 편지는 배달되지 않았다.
나의 인생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은 고교 친구 녀석의 권유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해소됐다. 종교라는 큰 틀 안에서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생의 궁금증을 해소하며 신앙의 자맥질을 맘껏 누릴 수 있었다. 교회에서는 나를 아꼈던 여선생님의 배려로 기타도 선물 받고 집에도 초대받아 가면서 편지를 적어 전달하면 선생님은 답장을 보내오곤 했다.
편지에는 학업에 충실할 것과 진로 문제에 대한 것과 교회와 사회생활 가운데 신앙적인 에피소드가 들어 있었다. 나는 일기나 편지 등으로 글 쓰는 것은 즐겼지만 음악으로는 젬병이어서 기타가 고마우면서도 내심 부담스러웠다. 군대에서는 보안상의 이유로 일기쓰기가 금지된다. 자연스레 글 쓰는 일은 줄어들었다.
한편 군대서 권하는 편지 쓰는 시간이 있는데 그때 어머니 전상서라는 제목으로 많은 편지를 보냈던 기억이 난다. 제대하고 나서 한참 뒤에 엄마가 소쿠리에 모아 둔 수북한 편지봉투를 하루는 찬찬히 읽어보았다. 지난 시절 군에 몸담고 있던 추억이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젊은 청춘의 피 끓는 나이에 타율에 매여 자유를 억압당한다는 것은 조국의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 속에서 군복을 입고 부대낀 세월들이 아스라한 과거의 것으로 밀려나 있었다. 나는 군대 제대를 앞두고 수동타자기를 배울 수 있었다. 타자기의 글자가 타닥타닥 한 자씩 합성돼 문장을 이루어 나갔다. 그때 서툰 타법으로 독학한 것이 현재 나의 타이핑 실력에 일조하게 됐다. 비오는 날 방안에 베개를 가슴에 괴고 엎드려 편지지 위에 펜을 움직여 그리운 이름을 불렀을 때 나는 소년이었다. 그때 한 자 한 자 적었던 보고 싶은 이름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