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_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풍성한 본론 구성하기
*참고 사항 : 이 글은 '기획의 3단 구성법' 두 번째 편으로 총 3편에 걸쳐 이어지며,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스포일러를 대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전개부, 즉 본론에서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극을 이끌어가는 주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니시리즈처럼 전체 호흡이 긴 시리즈에는 주인공이 다른 인물들을 만나면서 다양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때 인물의 목표이자 욕망을 이루고자 하는 구체적인 사건을 '통으로 흐르는 사건'이라고 부르는데요, 이 통으로 흐르는 사건은 갈등을 계속 유발하며 극을 지속시키는 메인 스토리입니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기훈이 어머니 수술비를 벌기 위해 게임에 참여하는 일이 '통으로 흐르는 사건'입니다. 통으로 흐르는 사건은 전체 이야기의 큰 줄기로, 백그라운드에 깔려 극을 이끌어가는 이정표 역할을 합니다. 전개부는 통으로 흐르는 사건 속에 다양한 서브플롯이 섞여 스노볼을 만들듯 이야기를 뭉치고 굴려 전개됩니다.
서브플롯은 각 인물들의 개인 서사와 목표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해 주인공과 인물들이 만나서 생기는 사건 및 관계의 변화 등으로 극에 다양성과 긴장감을 높입니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서울대에 입학할 정도로 수재인 상우의 이야기, 북한에서 탈북한 새벽의 이야기, 외국인 노동자로 한국에 온 알리의 이야기 등 각 인물에 맞는 서브플롯이 나오죠. 인물 개인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기훈과 상우의 관계, 상우와 알리의 관계, 기훈과 일남의 관계, 새벽과 지영의 관계 등 인물들 간의 교류로 일어나는 사건과 감정이 서브플롯에 속합니다. 서브플롯을 통해 관객은 주인공을 비롯한 매력적인 인물에 이입하고, 이야기에 더욱 공감하게 됩니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전개부의 전반부는 여러 사건으로 긴장감이 증폭돼 이야기가 상승하는 구간입니다. 기훈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 후 살육 현장에 질겁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현실 또한 게임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다시 게임에 참여하죠. 이후 달고나 뽑기와 줄다리기 게임까지 차례차례 긴장을 고조시킵니다. 이 사이 여러 캐릭터들의 성격과 관계, 이에 따른 갈등을 드러냅니다. 그중에서도 메인 캐릭터인 상우와 기훈의 사고방식과 의견 차이를 조금씩 보여주죠. 대표적으로 극 초반 게임에 반대하는 기훈과 찬성하는 상우, 협동해서 다 같이 이기려고 생각하는 기훈과 개인적으로 살 궁리를 하며 '달고나 뽑기' 게임을 눈치챘음에도 기훈에게 말해주지 않는 상우의 모습으로 점점 더 둘이 다르다는 걸 보여줍니다.
이야기의 발단부에서 전개부로 넘어갈 때 '자극적 계기'가 있었던 것처럼, 전개부의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넘어갈 때에도 인물에게 큰 영향을 주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비극적 계기'인데요, 이 부분에서는 말 그대로 인물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비극적인 계기가 발생하면서 이야기의 정점을 찍습니다. 전반부에서는 긴장감이 있으면서도 인물에게 긍정적인 일들이 주로 일어납니다. 기훈은 무궁화 게임에서 알리에게 도움을 받아 살아남고, 우연히 땀이 떨어져 달고나 뽑기에 성공하고, 할아버지 일남 덕분에 줄다리기에서도 이기죠.
하지만 이야기가 계속 긍정적이기만 하면 바로 지루해집니다. 그래서 비극적 계기를 통해 인물이 각성하고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도 하면서 이야기의 재미와 긴장감이 정점에 찍습니다. <오징어 게임>에서의 비극적 계기는 가장 신뢰하고 절친한 사이를 죽여야만 하는 '6화의 구슬 게임'입니다. 기훈에게는 게임에서 여러 조언과 힘이 되었던 할아버지 일남의 죽음, 상우에게는 유일하게 개인사를 밝히며 애정을 주었던 알리를 속여 게임에 승리하는 것, 새벽에게는 같은 여성이자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지닌 지영의 죽음이 비극적 계기가 됩니다. 세 인물은 이 사건을 통해 가장 가까운 사람 대신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가지게 됩니다. 여기서 기훈과 새벽은 상대의 희생으로 게임에서 승리한 반면, 상우는 자신의 의지로 상대를 속여 승리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여줍니다.
기훈과 새벽은 게임에서 꼭 살아남고자 하지만 인간성을 버릴 정도로 냉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남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 해결하려 하죠. 새벽은 기훈보다는 이기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지만, 남을 헤치기보다 자신의 능력으로 달고나 뽑기의 근거를 찾아내 머리가 좋아 보이는 상우와 딜을 하며 승리를 합니다. 반면 상우는 달고나 뽑기를 눈치챘음에도 기훈에게 알려주지 않았고, 여러 게임을 통해 신뢰를 쌓은 알리를 배신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았습니다. 상우가 인간성을 다 버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알리를 배신한 이 비극적 계기를 통해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느낌과 동시에 우승만이 삶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6화의 제목이 '깐부'인 것이 역설적으로 느껴지는 대목이죠.
비극적 계기 이후 극의 후반부에서는 인물에게 부정적인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며 극의 절정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래서 이 구간을 하강부라고 부르기도 하죠. 기훈은 일남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마지막 게임인 징검다리 건너기 게임을 합니다. 기훈은 인생에 주인공으로 살아본 적 없는 남자를 배려하며 맨 뒷번호를 선택하게 되는데, 이는 오히려 행운으로 작용합니다. 기훈의 인간성이 빛을 봤다고 할 수 있죠. 사다리 게임에서 살아남은 기훈과 새벽, 상우는 마지막 만찬을 먹습니다. 기훈은 유리 파편에 맞아 데미지를 많이 입은 새벽을 보고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웁니다. 그러나 그 잠깐 사이 새벽은 상우에게 당해 죽어버렸고, 기훈은 분노하며 상우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마지막 오징어 게임을 하면서 기훈과 상우의 관계는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전개부의 후반부에서 마지막으로 인물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사건이 발생하는데요, 이를 '마지막 긴장의 계기'라고 합니다. 마지막 긴장의 계기는 '위기에서 절정'으로 치닫는 구간으로, 인물들은 위기 상황에서 갈등을 겪으며 절정이 될 때까지 극도의 긴장 상태에 빠집니다. 이 상황에서 등장인물은 마지막으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데요, 상우와 치열하게 오징어 게임을 하다 그를 제압하고 기훈이 승리하기 직전이 마지막 긴장의 계기라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인물의 선택을 통해 그 사람의 성격과 가치관,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기훈은 잠시 고민하다 동의서 제3항 '과반수 이상이 동의하면 게임을 중단할 수 있다'는 항목을 읊으며 게임 중단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상우에게 손을 뻗으며 이제 그만 집에 가자고 말합니다. 기훈의 목표는 어머니의 수술비 마련이었지만, 누군가를 죽이면서까지 돈을 가져가고 싶진 않았던 거죠. 이 부분은 상우에게도 마지막 긴장의 계기인데요, 인상적이었던 점은 이때까지 인정사정없이 달려온 상우가 살아서 갈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점입니다.
'돈'이라는 목표를 향해 누군가를 죽이면서까지 올라왔던 자신과 달리, 죽일 수 있었음에도 자신을 살려준 기훈을 비교하며 스스로 감당 못할 죄책감과 자기혐오에 목숨을 끊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상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실적인 보통의 사람입니다.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상우처럼 어떤 짓이든 할 사람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게 옳은 선택은 아니죠. 어찌 보면 이런 극한 상황에서 타인을 살피고 마지막 순간 상금 대신 생명을 택한 기훈이라는 캐릭터가 정말 판타지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감독은 기훈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을 것입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기보다는 함께 배려하며 연대할 때 더 큰 행복과 행운이 따른다'는 메시지 말이죠.
기획으로 따지면 통으로 흐르는 사건은 '기획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획 목표를 향해 다양한 해결 방법이 제시되고, 여러 사례와 근거를 통해 기획은 설득력을 얻게 됩니다. 기훈의 목표는 게임에서 이겨 어머니의 수술비를 마련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상금을 타서 자신의 거지 같은 인생도 바꾸고 싶기도 했겠죠. 재미있는 점은 다른 인물들의 목표 또한 기훈과 같다는 것입니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모든 인물의 목표가 동일합니다. '상금을 타서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것'. 그러나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한 각자의 선택과 행동은 모두 다릅니다. 오징어 게임 속 등장인물들의 목표는 같지만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녔기에 각자의 결론도 다릅니다.
기획 또한 마찬가지로 누가 어떻게 본론을 설정했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흐름과 내용, 결론이 다릅니다. 본론의 내용은 기획의 알맹이와 같습니다. 본론에서 어떤 이야기와 메시지를 전달하느냐에 따라 듣는 사람이 공감이 갈 수 도, 안 갈 수도 있는 것이죠. 그래서 본론을 기획하는 데에는 충분히 많은 고민과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기획법 대서사의 마지막, 결론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