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_페르소나를 활용해 다양한 시각으로 기획 검토하기
기획을 하고 내용을 작성한 후에 필요한 것은 '검토'입니다. 물론 검토는 기획 단계뿐만 아니라 내용을 전개해 나갈 때도 틈틈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때 필요한 게 무엇일까요? 우선 전개한 내용이 기획 방향에 맞게 흘러가는지 살펴야 합니다. 기획 방향은 이정표와 같다고 말씀드렸죠. 기획 방향과 주제에 맞지 않는 이야기는 검토를 통해 내려놓거나 수정이 필요합니다.
기획 방향에 벗어나는 이야기를 가려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의 주관적 시선에서 벗어나 다른 시각으로 내용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때는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나와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생각지 못한 부분을 발견해 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종의 이유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기 어렵다면 어떡할까요? 그럴 때는 최대한 나의 생각을 배제한 채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기획서를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게 바로 요즘 가장 각광받는 마케팅 기법인 '페르소나' 즉, '부캐'를 활용한 검토입니다.
'페르소나'는 가면이라는 뜻으로, 연극 등 연기가 필요한 과정에서 그 캐릭터에 이입하는 것을 '가면을 쓰는 것'에 빗대어서 '페르소나'로 표현하곤 했습니다. 어떤 모임과 어떤 집단에 가느냐에 따라 나의 행동과 말이 조금씩 달라진 적 있으시죠? 친한 친구와 있을 때의 나와 회사에서의 나, 가족과 있을 때의 내 모습이 다 똑같지는 않을 겁니다. 예전에는 이런 나의 모습을 구분 지으려는 생각을 잘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90년대생의 부모님 세대만 해도 평생직장이 사회의 전반을 이루며 '회사가 곧 나'인 생활이 몇십 년 지속되었습니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자존감 열풍을 비롯해 '나 자신'에 대한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나의 여러 모습'에 대한 탐구는 깊어졌습니다. 평생직장의 시대 또한 저물면서 더 이상 '회사=나'가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죠.
그렇게 회사와 나를 동일시하지 않으려는 90년 대생들은 '워라벨'을 추구하는 성향으로 진화되었고, '회사 바깥에서의 나의 모습'을 꿈꾸며 회사의 자아와 내 삶의 자아를 분리했습니다. 이 현상에 불을 지핀 것이 ‘유튜브’입니다. 2010년대 중후반부터 유튜브가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면서 일반인들이 연예인처럼 인기를 얻는 '인플루언서'가 등장했습니다.
이로 인해 퇴사를 하거나 부업을 하면서 디지털 노마드나 파이어족이 되고자 하는 'N 잡러'의 시대가 도래했죠.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개인이 늘어나면서, 회사 바깥에서의 모습이자 또 다른 나의 페르소나인 '부캐'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부캐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MBC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서 부터입니다. 10년 이상 장수하며 국민들의 토요일 저녁을 책임졌던 <무한도전>의 김태호 피디가 후속작으로 만든 프로그램이죠. 김태호 피디는 매번 기발한 상상력과 뛰어난 기획력으로 무한도전을 이끌며 다양한 재미와 감동을 주었습니다. 김태호 피디는 시대를 읽는 흐름과 이를 기획하고 프로그램에 적용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놀면 뭐하니?>가 시작된 2019년은 이미 유튜브와 인플루언서를 통해 '부캐'가 흥행하고 있던 시점이었습니다. 김태호 피디는 아마도 이 시대상을 읽었을 테고, 국민 MC 유재석은 무한도전에서 이미 춤과 노래, 연기 등 시키는 대로 곧장 잘 해냈기 때문에 '부캐'라는 주제로 프로그램을 내는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양한 가수, 프로듀서가 함께 노래를 만들고 그 비트에 드럼 연주를 하는 '유플래쉬'에서 시작된 유재석의 부캐 행진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놀면 뭐하니?>가 큰 주목을 받은 시점은 유재석이 트로트를 부르며 '유산슬'로 활동하던 시기입니다. 이때는 전국에 트로트 열풍이 불면서 임영웅, 송가인 등 다양한 트로트 스타가 탄생했고, 덕분에 티비만 틀면 트로트가 나와서 볼 게 없는 기현상(?)을 겪기도 했죠. 잘 된 기획은 이처럼 수많은 모방작을 만들어냅니다. 유산슬의 힘에 입어 유재석의 부캐는 끝없이 증가했고, 이듬해 여름에는 비와 이효리가 함께한 '싹쓰리'가 결성되었습니다. 비와 이효리도 '비룡'과 '린다 G'라는 부캐로 활동했죠. 싹쓰리의 인기는 훗날 SG워너비의 명성을 잇는 'MSG워너비'의 탄생 배경이 되었습니다.
<놀면 뭐하니?>의 성공 이후 방송계를 비롯한 산업 전반에서 '부캐'를 활용한 마케팅을 실행했습니다. EBS에서는 펭귄 모양의 깜찍한 '펭수'를 개발해 MZ세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펭수 탈을 쓴 사람의 정체가 들키지 않도록 어떤 순간에도 철통 보안을 지켰다고 하죠. 그리고 식품 기업 빙그레에서는 '빙그레우스'라는 캐릭터를 개발 후 이를 통해 브랜드의 제품과 스토리를 소개하여 오래된 브랜드에서 트렌디한 브랜드로 재조명 받았습니다.
부캐는 이제 개인의 영역을 뛰어넘어 기업의 영역으로 들어왔습니다. 기업은 부캐를 이용해 브랜드의 스토리와 철학, 메시지를 보다 쉽고 재밌는 방식으로 소비자에게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부캐를 만들기만 하면 다 성공일까요? 아닙니다. 펭수와 빙그레우스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촘촘하게 짜인 '세계관' 때문입니다.
'세계관'은 스토리나 브랜드의 전반적인 성격과 캐릭터, 이야기의 모든 구성 요소가 어우러진 세계를 말합니다. 게임과 소설의 예를 들면 시대상, 배경, 등장인물의 성격과 특징 등 세계관은 브랜드와 이야기의 큰 부분에서 작은 부분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이러한 세계관은 호흡이 긴 시리즈물에서 빛을 발하는데, 대표적으로 '마블'이 있습니다. 마블 시리즈는 공유하는 세계관이 동일하기 때문에 각 히어로의 개별 영화가 제작 가능하며, 오히려 이렇게 각 인물별 영화가 나왔을 때 더욱 그 인물을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캐를 활용해 세계관을 구축한 좋은 예로는 유튜브 채널 '피식 대학'의 코미디언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처음 부캐로 빛을 본 인물은 김해준이 연기한 '최준'입니다. 최준은 코로나로 인해 소개팅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B(비)대면 데이트'라는 기획으로 나온 캐릭터입니다. "어? 예쁘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수많은 여성들의 질타를 받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거부할 수 없는 중독성으로 인기를 얻었죠. 코 먹은 비음과 자존감 충만한 자기애, 느끼하지만 멘트는 스위트한 게 최준의 매력 포인트로, '준며든다(최준+스며든다)'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피식 대학이 인기를 얻은 것은 단순히 부캐를 만들어 일회성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개그 코너를 짜듯 콘텐츠의 주제를 기획해 그 기획에 맞는 부캐를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최준을 연기한 김해준이 출연한 다른 콘텐츠 '05학번 이즈 백'은 2000년대 초반 패션과 시대상을 재현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동대문 시장에서 옷을 파는 '쿨제이'와 쿨제이의 여자 친구이자 밀리오레를 주름잡는 댄스퀸 '길은지' 등 '05학번 이즈 백'에 등장한 인물들은 모두 부캐로 그 시대를 다시 들여다보는 착각이 들 정도로 재연을 잘했습니다. 개그 프로그램이 연달아 폐지되면서 유튜브로 자리를 옮긴 개그맨들의 기획력이 돋보이는 순간이었죠.
최준이 흥행하면서 피식 대학의 다른 개그맨들의 부캐도 주목받았습니다. 최준이 인기를 얻은 비대면 데이트에서 발굴한 또 한 명의 다크호스, 김갑생할머니김의 미래전략실 본부장 이호창입니다. '김갑생할머니 김'이라는 가상의 회사를 설정해 연기를 한 건데요, 이 콘텐츠가 인기를 얻자 지도표 성경김과 콜라보 굿즈로 실제 <김갑생할머니 김>이 제작돼 판매되기도 했습니다. 가상의 세계관과 콘텐츠가 인기를 얻자 역으로 실제 굿즈가 탄생된 것입니다. 이는 세계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세계관에 매료되고 몰입된 팬들이 모여 팬덤이 형성되고, 이런 팬덤은 브랜드와 소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입니다.
이호창을 연기한 이창호는 피식 대학의 다른 세계관에도 출연합니다. 중년 남성들의 뜨거운 열정이 꿈틀대는 '한사랑 산악회'의 부회장으로 실제 옆집 아저씨 같은 친근함을 보여주는 '이택조', 그리고 2021년 최고의 아이돌이자 아이돌의 틀을 깬 그룹 '매드 몬스터'의 '제이호'까지. 제이호는 매드 몬스터의 멤버로 활약하며 음원을 내고 엠카운트다운에서 활동을 하기도 하며 최고의 인기를 구사했습니다. 부캐임에도 불구하고 세 인물 모두 겹치지 않는 특징과 특유의 뻔뻔한 매력이 이창호가 연기하는 부캐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됩니다.
2021년 가장 주목받고 있는 걸그룹은 누구일까요? 제가 좋아하는 그룹이기도 한 '에스파'입니다. 에스파는 SM에서 데뷔한 걸그룹으로 미래지향적인 컨셉과 뛰어난 미모와 실력으로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부캐 이야기를 하는데 왜 에스파를 말하냐고요?
에스파는 요즘 가장 각광받고 있는 '메타버스'를 도입한 걸그룹이기 때문입니다. 메타버스는 웹상의 세계에서 가상의 아바타를 이용해 현실과 비슷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입한 것입니다. '메타버스'는 가공, 추상을 의미하는 '메타'와 현실 세계를 의미하는 '유니버스'가 합성된 말로,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무너진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에스파는 자신들의 스토리와 캐릭터에도 메타버스가 중요한 컨셉이자 세계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각자의 성격과 외모를 본뜬 가상의 아바타 ae가 가사에 등장하며 뮤직비디오, 무대 활동에도 나타납니다. 에스파 멤버들의 부캐가 ae가 되는 것이죠. 에스파 걸그룹의 메타버스 세계관은 현재 금융, 엔터 등 전 산업에 걸쳐 증가하는 메타버스와 함께 산업을 선도한다는 점에서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합니다.
오늘 보여드린 수많은 사례처럼 요새는 기획 단계부터 부캐를 활용해 브랜드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획의 시작과 끝까지 부캐를 활용해 평소 바라보던 것과 다른 시선으로 내용을 점검해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굳이 브랜드를 위함이 아니더라도 나만의 부캐를 생성해 안 하던 딴짓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지루한 일상에 재미를 줄 것입니다. 혹시 알까요? 그 부캐가 나의 또 다른 자아, 또 다른 명함이 되어 제2의 최준, 제2의 제이호를 만들어줄지도 모르는 일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