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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크 타이프 Oct 30. 2021

밤의 마침표

디스플러스, 밤의 플러스

정적, 자정을 가리키는 시계의 눈금, 차고 싸늘하고 건조한 바람, 바스락 떨어지는 낙엽, 불면을 암시하는 에스프레소 투 샷, 이 쓰디쓴 커피를 따뜻한 물에 희석한 아메리카노, 당연히 곁들여야 할 재즈, 그리고 한 권의 책 - 아주 오래된, 그래서 ISBN도 없고 책 뒷 표지에 바코드도 찍혀 있지 않은, 책등 한 귀퉁이는 떨어져 나갔고 책장은 누렇게 바랜, 코를 갖다대면 축축한 종이의 찌든 냄새 가득한, 우울한 자아의 내면을 한껏 부풀려 문장에 네가티브 어트렉션을 담뿍 담았던, 그런 1980년대의 소설책 따위  - 을 펴지만 책이 아닌 다른 모든 것에 집중하게 만드는 밤의 미묘한 마력 때문에 고개를 들면 보이는 건 시커먼 앞 동 아파트에 박힌 빼곡한 창문들,


 의미없고 재미도 없는 아파트 풍경을 보면 문득 강북 어느 오랜 동네의 골목이 그리워 지면서 떠오르는 오렌지 빛 가로등 불빛과 꼬불꼬불 이어진 골목길, 골목길 한 귀퉁이에서 점멸하는 오래된 여인숙의 간판, 그 간판을 보면 어딘지 모를 슬프고 뜨듯한 창녀의 몸을 연상하게 되는데 그런 창녀와의 알싸한 대면 후에 꼭 찾게 되는 포장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어 기억해 낸, 신대방역 굴다리 밑에서 소주를 잔술로 팔고 그래서 닭꼬치 한 줄과 소주 두 세잔으로 늦가을의 허기를 채울 수 있었던 포장마차,  남대문 상가 길목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포장집들과 종로 3가 길목 어딘가에 대책없이 늘어서 있던, 가락국수 따위가 꽤나 맛있었던 또다른 포장집들, 그렇게 늦가을의 허기를 채우고 가끔씩 들렀던 후암동 산비탈, 그곳에서 바라보는 해방촌 밤 풍경에 반해 2년인가 아예 후암동 산비탈 끝자락에 위치한 빌라에서 살았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그렇게 보낸 2년 간의 추억 속에는 오늘처럼 자정이 넘어 시작되는 기나긴 밤이 자주 출현했고, 그렇게 시작된 적적한 밤에 길을 나서 독일 문화원 길을 걷다보면 몸을 팔기 위해 버스 정류장 주변에서 짧은 치마를 입고 외롭게 서서 물끄러미 스마트폰을 쳐다보고 있는 트렌스젠더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녀, 아니 그놈, 아니, 그 녀석, 그 자식, 아니 그 여자, 아니 그 사람은 호기심에 눈을 흘겨 아래위를 훔쳐보던 나의 시선 불편해 몸을 살짝 움츠리고 나는 그 이의 어색한 태도 변화에 괜히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가도 고요한 긴 밤의 정서를 미묘하게 망쳐버린 그 작자에게 화가 나기도 했었던…


자정, 정적을 가리키는 시계의 눈금, 차고 싸늘하고 건조한 바람, 바스락 떨어지는 낙엽,  을 암시하는 이 쓰디쓴 커피를 따뜻한 물에 희석한 아메리카노, 다시 시작되는 추억 되새김질, 이 긴 밤, 앞으로의 불면에 대한 미묘한 기대와 긴장 속에 가끔씩 찾아오는 “실비같은 졸음”(from 장정일의 소설,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좀 더 풍부하고 조금은 더 무겁게 나를 누르고 흔들고 어루만지는 이 밤, 이 밤, 아직 멀고도 긴 이 밤, 기나긴 방황의 시작, 이 아찔하고 신비로운 기운에  문득 놀라 주위를 돌아보면 어느새 방 안에 가득찬 따뜻하고 슬픈 외로움,

by Mike Type. 목탄.


이 외로운 밤을 완성해 줄, 단 한 모금!의, 담배, 2100원짜리, 4100원까지 화대는 올랐지만 십 수년동안 이 외로운 밤을 만져준, 나의 디스플러스! 밤의 플러스! 나는 6개월 전 담배를 끊었기에, 그래서 이 긴 밤은 끝나지 않는, 이 길고 차갑고 건조하고 무심하고 고요한 밤은 도저히 어떻게든 마무리지을 수 없는, 마침표 없는 문장과도 같은…아! 담배가 부재하는 이 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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