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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멀었다,

완전무장한 자영업자 되려면...

by 마이크 타이프 Feb 1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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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5미터짜리 그럴듯한 간판을 2층 벽면에 설치했다. 아침 7시 30분에 간판업체에서 사다리차를 대동하고 한 시간 만에 뚝딱 설치했다. 업체 사장님에게 전화가 온 것은 8시 30분이었다.


- 사장님, 간판 설치 끝났습니다.

- 아, 네. 제가 아침에 시간 맞춰 가게에 가본다는 게, 못 갔네요.

- 네. 오실 필요 없어요. 저희가 다 해놓고 방금 불이 잘 들어오는지도 확인 다 했어요.

- 네, 감사합니다. 제게 설치 사진 좀 보내주실래요?

- 그럼요. 보내드릴게요.

- 네, 고생하셨습니다.


어제 영업을 마감하고, 설거지를 하고 가게 정리를 하고 집에 오니 새벽 3시였다. 샤워를 하고 왠지 헛헛한 마음에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잠든 시각이 4시 20분쯤이었나. 7시 전에 일어나 현장에 간다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오후 1시가 되어서야 가게로 나갔다. 텅 비어 있던 자리에 꽉 찬 알파벳 글자의 간판이 걸리니 그럴듯하다. 저녁이 되어 간판에 불이 켜지면 더 멋있을 것 같았다. 간판업체 사장님은 간판 불이 켜지고 꺼지는 타이머를 오후 5시 ~ 오전 1시로 맞춰준다고 했다. 해질 무렵, 7시가 넘으면 간판 불이 훨씬 밝게 빛나겠지. 


가게에서 어제 닦지 못한 바닥을 닦고, 새로운 카페 메뉴를 만들어 보고, 거래명세표들을 정리하고 저녁 8시가 되자 나는 밖을 나왔다. 간판엔 불이 들어와 있었고, 블랙 배경에 아이보리색 LED등을 감싼 알파벳들은 제법 근사했다. 시야의 측면을 공략하는 돌출 간판도 마음에 들었다. 디자인에 대한 고민을 좀 더 했어야 했나, 아쉬움도 남았지만 어차피 고민을 더 해보았자 거기서 거기였을 거다.


나온 김에 동네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먼발치에서 1점 소실점을 향해 걸어오며 가게의 돌출간판도 어떻게 눈에 들어오는지 살펴봐야지.

브런치 글 이미지 1

가게 앞까지 70~80미터 정도를 남기고 걷던 중 중년의 남자 둘이 길에 서서 나누는 대화 내용을 우연히 듣게 된다.


- 여기 근처에 좀 어디 갈만한 데가 없나.

- 카페 좋은데 좀 없나, 오랜만에 분위기 좋은 곳으로 가봅시다.

- 어디 보자, 딱히 갈 만한 곳이 없네. (두리번두리번)


나는 이들의 대화를 듣고 주춤했다. 어떡하지? 오늘 드디어 대문짝만 한 간판도 달고, 카페 영업도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손님이 막 몰려오는 행복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런데 지금 점잖게 생긴 이 두 양반들이 "가볼 만한 카페"를 찾고 있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 말을 걸어야 한다.


- 저기, 잠시만요. 혹시 갈만한 카페 찾으시나요?

- 네, 맞아요.

- 저희 카페 오늘 오픈했는데 한번 가보시겠어요? 분위기 아주 좋습니다. 메뉴도 맛있고요.  

- 아, 그래요? 여기서 멀어요?

- 아뇨, 1분 정도만 걸으시면 됩니다.

- 여기로 가볼까?

- 그거 좋겠다. 가봅시다. 안내하세요.  


... 이렇게 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질 못했다. 망설였다. 모르는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에 갑자기 끼어드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왠지 좀 쑥스러웠다. '호객행위'라는 부정적인 단어도 생각났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들의 대화를 듣자마자 정중하게 제안을 하면 될 것을. 주저주저하고 있는 사이, 이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그냥 보이는 데, 여기 갑시다, " "그럽시다, 딱히 괜찮은 곳이 없네"라며 근접한 카페로 들어갔다.


찰나였다. 내가 고민하는 시간, 이들이 어디 갈까 논의하는 시간, 길어봤자 10초가 되지 않았다. 그 10초 동안 그렇게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갈 수 있다는 게 신기했고,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할 시간에 그냥 다가가서 '호객행위'를 하는 게 더 쉬웠겠다. 한심했다.


물론 두 명의 중년남자들이 내 가게를 들어와 보고 다시 나갔을 수도 있다. 우리가 마시고 싶은 게 없다며 "다음에 올게요"라는 예의차린 거짓말을 하며 떠났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아쉽긴 해도 후회는 남지 않았겠지. 후회의 맛은 강렬하게 찝찝하고 긴 여운을 남긴다. 해봤는데 잘 안되었다면 아쉽긴 해도 개운한 뒷맛을 남긴다.


매출을 올려야 하는데, 그게 아직은 절실하지 않은 건가 보다.  배가 덜 고픈가 보다. 완전무장하고 자영업 전쟁터에 나서도 살까 깐데... 아직 멀었다. 늘밤엔 숨이 찰 때까지 달려봐야겠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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