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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꿀청을 담았다

영등포 그랜드마마 도라지꿀차

by 마이크 타이프


영등포 그랜드마마 도라지꿀차

가게에서 가까운 영등포역 2번 출구 앞에 가면 항상 볼 수 있는, 연세가 꽤 많아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있다. 나는 속으로 이분을 ‘영등포역 2번 출구 마스코트’라 부른다. 역 출구 앞에서 노상에 돗자리를 깔고 더덕, 도라지, 콩 등을 파신다.


어찌나 성실하고 열정이 대단한지 지난겨울 영하 10도의 한파에도 꿋꿋하게 나오셔서 자리를 펴고 장사를 하셨다. 차가운 땅바닥에 뭐라도 깔고 계시나 살짝 보니 얇은 스티로폼 방석 정도가 전부다.


차가운 바람에 코트 깃을 여미며 슬쩍 할머니의 얼굴을 살핀다. 추위 때문인지 콧잔등과 귀에 벌건 핏발이 서려 있었다. 주름 가득한 얼굴은 피곤해 보이지만 목에 두른 밝은 오렌지색 스카프 때문일까, 표정은 어둡지 않다.

by hazydrawing


괜한 측은지심이 마음속에서 발동하지만 이내 머리를 가로젓는다. 타인에 대한 섣부른 동정, 불쌍히 여기는 마음 따위는 굉장한 무례일 수 있다. 살아보니 그렇다. 차림새가 남루하다고, 나이가 많다고, 몸이 불편해 보인다고, 형편이 넉넉지 않아 보인다고 성급한 동정심을 갖는 건 상대방의 자존(스스로 존재함)을 훼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이에게 실질적인 도움도 주지 않으면서 쯧쯧쯧 동정의 눈길만을 보내는 건 더더욱 무례하다. 불필요한 동정심을 갖다 보면 자칫 대등한 인간관계를 우열의 관계로 착각할 수도 있다.


할머니를 지나쳐 길을 걷다 발걸음을 돌렸다. 할머니가 까놓은 도라지를 몇 봉지 사볼까 한다. 마침 카페 음료 메뉴를 구상 중이었는데 마땅히 특별한 음료가 생각나지 않았다. 커피는 기본이니 메뉴에 넣는다 해도 허브차 티백이나 아이스티 같은 너무 흔한 음료까지 포함시키자니 아무런 특색이 없고. 굳이 내 카페에서 팔아야 하는, 그래도 나름의 의미를 담은 메뉴를 넣고 싶은데 그런 걸 만들어낸다는 게 쉽지 않다.


그런데 할머니가 파시는 도라지를 보고 문득 떠올랐다. 이 도라지를 사서 꿀에 넣고 도라지청을 담아보자. 끓는 물에 담근 청을 한두 스푼 넣고 녹이면 진한 도라지꿀차이 되지 않겠나. 영등포역 2번 출구 마스코트인 할머니 사장님이 정성스레 까놓은 도라지로 만든 도라지꿀차, 이름하여 ‘영등포 그랜드마마 도라지꿀차.’ 그래, 그거 좋겠다.


칼바람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더덕을 까는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사장님, 이거 도라지 한 봉지에 얼마예요?

- 5,000원이에요.

- 이거 다 사장님이 까시는 거예요?

- 그럼, 내가 다 까는 거지.

- 네, 이거 두 봉지만 주세요.


나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사장님에게 건네며 물었다.

- 근데 좀 춥지 않으세요?

할머니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 춥지, 왜 안 추워. 그래도 이렇게 나와 있어야 해. 매일 같이 나와야 장사가 돼. 안 그럼 장사 못해.

- 네, 고생하세요. 또 사러 올게요.


어느덧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도라지청도 숙성이 다 된 것 같다. 밀폐용기에 담긴 청을 몇 스푼 떠 뜨거운 물에 넣고 젓는다. 한 모금 마셔보니, 글쎄, 기대했던 맛이 나지 않는다. 미세먼지로 텁텁해진 목을 가라앉혀줄 달콤쌉쌀한 맛을 기대했는데 뭐가 잘못되었을까. 팔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겠고, 내가 다 마셔버리자니 혈당 스파이크가 올 것 같다. 맛있게 만든 도라지꿀차가 많이 팔려야 나도 돈을 벌고 할머니 사장님도 돈을 벌 텐데. 내가 구상했던 나름의 윈윈전략에 차질이 생긴 것 같아 아쉽다.


결국 다시 도라지를 사러 영등포역 2번 출구로 향한다. 멀리서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어김없이 뭔가를 까고 계시는 할머니가 보인다. 날씨가 풀려서인지 그리 두텁지 않은 오렌지색 폴리스 소재 외투를 입고 계신 것 같다. 오렌지색을 좋아하시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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