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튀김은 튀김임을 잊지 말자.
어느 평일 저녁, 블랙 스커트가 꽤나 잘 어울리는 여자 손님이 가게에 들어왔다.
아는 얼굴이다. 얼마 전 열었던 와인 시음회에 오셨던 손님이다. 혼자 참석했던 분인데 옆자리에 앉은, 혼자 온 또 다른 손님과 금방 친해져 서로 얘기 나누며 시음회를 즐기고 갔던 분이다. "다음에 책 볼 겸, 와인 한 잔 할 겸 또 올게요"라는 말을 남겼는데, 진짜 오셨군요. 나는 반갑게 인사하며 자리로 안내했다. 지난번 시음회 때 그녀가 앉았던 자리다.
그녀는 하우스와인 한 잔과 함께 가벼운 안주거리로 '트러플 오일 프렌치프라이'를 주문했다. 저희 가게 감자튀김 나름 인기 메뉴예요, 맛있어요,라는 말을 시작으로 우리는 아주 잠시 담소를 나눴다. 어떻게 영등포 뒷골목에 (뜬금없이) 와인바를 차리게 되었는지에 대해, 지난번 와인 시음회에 대해. 몇 마디의 대화 후 나는 하우스와인 한 잔을 테이블에 놓고 프렌치프라이 조리를 시작했다.
사실 조리랄 것도 없다. 크기가 작은 주방에 맥도널드에서 쓰는 감자튀김기를 놓을 수는 없는 일이라 냉동 감자튀김을 오븐에 재가열 한다. 오븐에 230도, 12분을 세팅해 조리하고 트러플오일과 치즈가루, 바질 파우더를 뿌리고 아이스크림을 곁들여 완성한다. 맛도 생각보다 훌륭하고 가성비도 좋아서 나름 인기가 좋은 메뉴 중 하나다.
프렌치프라이와 아이스크림을 그녀 앞 테이블에 놓았다.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온 책 - 양귀자의 <모순> - 을 읽고 있었다. 양귀자 작가를 좋아하시냐,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오랜만에 홀로 앉아 와인과 책을 즐기는 손님을 보니 반가웠지만 손님의 '독서'를 방해해선 안된다.
한 시간 반쯤 지났을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걸어 나왔다. 계산을 치르고 나가는 그녀를 문 앞까지 배웅했다. 또 오세요라고 인사하자 그녀는 말없이 목례를 건넸다.
그녀가 머물렀던 테이블을 치우는데 문득 서늘한 느낌이 든다. 감자튀김이 그대로 남아있다. 서 내거나 집어 먹었을까, 정말이지 감자튀김이 진열용 레플리카처럼 그대로 남아있다. 맛이 없었나? 고개를 갸우뚱하며 하나를 집어 먹어본다. 차갑고 딱딱하고, 건조했다. 만든 지 두 시간이 다되어 가니 차가운 건 당연하다. 하지만 딱딱한 건 좀 이해할 수 없다. 처음엔 괜찮았다. 안주로 내기 전에 항상 작은 조각 하나를 먹어본다. 그땐 정말 맛이 괜찮았다. 그런데 지금은 몹시 딱딱하다. 특히 길쭉한 튀김의 양끝이, 씹으면 오도독 소리가 날 정도로 딱딱했다. 식감이 푸석푸석한 것도 문제였다. 겉바속촉 감자튀김이어야 하는데 겉은 딱딱하고 속은 푸석푸석한, '겉딱속푸'가 되어 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아~씨를 뇌아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오븐 쿠킹 시간이 잘못된 것일까? 처음 안주 메뉴로 올리기 전에 나름 여러 번 실험을 거친 메뉴다. 감자의 두께와 양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걸 알았을 때 오븐에 초기 설정된 '감자튀김'용 세팅을 믿지 않고, 직접 '최상의 레시피(?)'를 고민했다. 180도에 18분, 200도에 15분, 230도 12분. 두꺼운 감자칩, 얇은 감자칩. 오븐에 구우면 칩의 양끝이 갈색으로 변하며 딱딱해질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조리 중간에 집게로 감자를 한 번 휘젓는다.
그렇게 나름의 연구를 거듭해 제법 맛있다는 소리를 듣는 감자튀김이었는데, 오늘은 뭔가 실패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맛없는 안주를 먹고 가는 손님이 재방문할 확률은 낮다. '나라면'이라는 가정법을 적용해 봐도 그렇다. 나라면 다시 안 간다. 이제 양귀자의 <모순>을 읽고 있던, 지적인 그녀를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재방문한 손님을 잃는 건 나라와 부모를 잃은 슬픔 다음으로 슬픈 일이다.
영업이 끝난 후 프렌치프라이를 다시 조리해 본다. 오븐의 온도와 시간을 몇 가지 경우로 구분해 여러 차례 조리해 보았다. 트러플 오일과 소금의 양도 조절해 본다. 맛은 괜찮다. 다시 고개를 갸우뚱해 본다.
이게 문제였다. '괜찮은' 맛. 정말 맛있다, 가 아니라 괜찮네, 정도의 평가가 나오는 맛. 가벼운 와인 안주로 나가는 것이니,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닌 '감자튀김'에 불과하니, 주방 사정이 녹록지 않으니 그냥 '괜찮은' 맛 정도 내는 걸로 만족했던 건 아닐까. 괜찮은 맛은 어정쩡한 맛이라 누군가는 괜찮네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게 뭔 맛이야, 하며 얼굴을 찌푸리게 할 수도 있는 맛이다.
여분으로 사놓은 아직 뜯지 않은 냉동 감자튀김 봉지를 살펴본다. 봉지에 적힌 조리방법을 읽어보았다:
"튀김기: 끓는 식용유(175도)에 2~3분 또는 원하는 색이 될 때까지 튀겨 드십시오."
이거였구나. 감자튀김은 '튀김'이었구나. 오븐에 굽는다고 맛이 살아나는 게 아니었구나. 튀김집에서 초벌 튀겨놓은 고구마튀김, 오징어튀김을 오븐에 구워주던가, 아니면 끓는 기름에 다시 튀겨주던가? 오븐에 넣어 재가열해주는 튀김집은 아직 본 적이 없다.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부었다. 식용유가 끓어오르자 냉동 감자칩을 넣고 타이머를 2분에 맞추었다. "원하는 색"이 나오지 않아 조금 더 튀겼다. 뜰채로 건져 기름종이에 튀겨진 감자칩을 올려놓았다. 트러플 오일을 스프레이 하고 소금, 그리고 바질 파우더를 뿌렸다. 마지막으로 고다치즈를 갈아 뿌린다.
종지에 담긴 케첩에 감자튀김 한 개를 찍어 입에 넣는다. 맛이 있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 맛있다. 감자튀김은 튀김이었다. 튀김은 튀겨야지, 오븐에 재가열하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잘못된 거였다. 다음엔 생감자를 직접 썰어 튀겨봐야겠다. 그럼 더 '정말 맛있어'질 것이다.
연락처를 안다면 나의 프렌치프라이에 상처받았을 그 손님에게 문자 메시지라도 남기고 싶다. 프렌치프라이가 훨씬 맛있어졌으니, 무료로, 튀겨서 드릴 테니 한 번 다시 오시라고. 맛있는 감자튀김과 함께 양귀자의 <모순>을 완독 해보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