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것, 얻는 것, 그리고 깨달은 것
바쁨이 일상을 덮쳤다. 이럴 땐 생각과 마음의 템포가 더욱 바빠진다.
8월 말의 뜨거운 여름날,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오전부터 몇가지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날이다. 종종 이런저런 강의를 하는데 오늘은 두 개 학교에 강의를 나가야 한다. 강의를 모두 마치고 어린이집에 들러 두살짜리 딸을 하원시켜 집에 갔다가 다시 가게로 가야 한다. 시간을 계산해보니 일정을 마치고 가게에 도착하면 가까스로 오후 6시 50분, 오픈 시각 10분 전이다. 7시에 온다는 예약손님이 있으니 오픈이 늦으면 정말 곤란하다.
이런 날엔 몸도 따라주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뻑뻑하고 종아리는 터질 듯 퉁퉁 붓고 머리가 아픈게 컨디션이 말이 아니다. 아마도 어제 마감을 늦게 하고 새벽 2시 넘어 배가 너무 고파 라면을 먹은 게 화근인 것 같다. 할 일이 많은데 몸이 안 따라주면 마음이 먼저 지친다.
겨우겨우 일정을 마치고 가게로 향했다. 마을버스를 타는게 가장 빠르고 편하다. 가게까지는 2킬로미터 남짓한 거리였기에 그냥 걸어도 되는 거리라 평상시였다면 산책 겸 걸어도 좋은 길이다. 하지만 오늘은 한가롭게 걸을 수 없다. 그렇다고 뛰자니 몸이 천근만근이다. 잰걸음으로 마을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거의 다 도착했을 때 마을버스가 부르릉 나를 앞질러 정류장에 도착했다. 뛰어야겠다는 생각도 하기 전에 뛰고 있다.
하늘은 종종 무심하다. 그리고 버스 기사는 더 자주 무심하다. 버스를 향해 뛰어오는 나를 보았을 법도 한데 나를 태우지 않으려 작정한듯 버스는 서둘러 떠났다. 내가 정류소에 도착했을 때 정확히 버스의 뒷바퀴가 내 왼편을 스쳐 지나간다. 버스의 사이드 미러를 향해 세차게 손을 휘저었다. 내 손을 보았는지 버스는 엑셀을 더 세게 밟으며 차선을 옮긴다. 나는 (정말 나도 모르게) 아!라고 소리쳤고, 다른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소 사람들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안내게시판에 "다음 버스는 14분 후"라는 메시지가 뜨고 내 얼굴도 누렇게 뜬다. 짜증이 몰려왔다. 어쩔 수 없다, 뛰자. 그까짓 2킬로미터, 뛰면 된다. 뛰고 만다. 신고 마라톤도 뛸 수 있다는 락포트 구두를 신고 있으니 발도 아프진 않을 거다.
뛰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뛰는 도중 만난 횡단보도 신호등은 내가 도달하기만 하면 그린라이트로 바뀐다. 덕분에 쉬지 않고 달린다.
가게에 도착하니 7시 2분 전. 2분동안 찬물 세수만했다.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30도가 훌쩍 넘는 여름 날씨에 긴 셔츠를 입고 무거운 가방을 매고 냅다 뛰었으니 땀이 안나는 게 더 이상하다. 세수를 마치고 서둘러 옷을 갈아 입었다. 손님들에게 땀에 절어 있는 옷을 입고 숨을 헐떡거리며 손님을 맞을 수는 없다. 가게에 구비해 놓은 여분의 속옷과 셔츠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음악을 틀고 한숨 돌리고 나니 예약손님이 문을 연다. 7시 2분.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차분한 어조로 손님을 맞이한다. 손님을 자리로 안내하고 서빙할 물을 컵에 따르는데 뒷목에서 땀이 흐른다. 슬며시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주문받은 와인과 안주를 손님 테이블에 내려놓고 다시 찬물 한잔을 마셨다. 땀으로 배출된 수분을 다시 채워야 한다.
그런데 문득 어떤 상쾌함이 몰려온다. 특히 퉁퉁 붓고 터질 것 같이 거북했던 눈의 불편함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슬쩍 거울을 보니 얼굴의 붓기가 많이 빠졌고, 피부도 매끄러워진 것 같다. 아마도 본의 아니게 격한 러닝을 하면서 흠뻑 흘린 땀이 눈과 얼굴의 붓기를 함께 흘려 내보낸 것 같다. 그래,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고 떠나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다. 버스를 놓쳐 뛰었더니 개운한 몸과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마감 시간 한 시간 전쯤 되자 단골이자 고교 동창인 친구가 가게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오늘의 에피소드 얘기를 들려주었다. 눈도 아프고 컨디션도 좋지 않았는데 버스를 놓쳐 냅다 뛰었더니 오히려 컨디션이 좋아지더라. 그러니 뭐 하나 잃었다고 슬퍼하거나 뭐 하나 떠났다고 섭섭해하지 말자.
그랬더니 친구는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이다 다시 오른쪽으로 갸우뚱 꺾으며 나에게 묻는다.
- 그런데 그럴 땐 따릉이를 타면 되지 않아? 이 더운 날씨에 뛸 생각을 하다니.
- 따릉이?
- 그래, 따릉이.
생각해보니 나는 태어나서 한번도 따릉이를 타본 적이 없다. 웬만하면 내 차를 몰고 나가거나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가까운 거리는 그냥 걸어다녔고, 이것저것 다 귀찮으면 택시를 타고 다녔다. 거리 곳곳에 설치된 따릉이를 보면서도 따릉이를 타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신기하다. 따릉이 앱을 깔고 요금을 결제하는 정도의 자잘한 귀찮음을 여태껏 회피해왔는지도 모른다.
따릉이 탈 생각만 했더라면 버스 놓칠 걱정에 뛰지도, 떠나간 버스에 분노할 필요도, 땀을 뻘뻘 흘리며 뛸 필요도 없었잖아! '이건 좀 허망한 일'이란 생각에 마음의 평화가 다시 흔들린다.
다행히 친구가 이렇게 위로를 건넸다.
- 아니지, 친구야. 네가 오늘 버스를 놓치지 않았다면 뛸 일도 없었을 거고, 그랬다면 땀 쭉 빼고 몸의 붓기도 빠질 일도 없었을 거고, 나에게 오늘의 에피소드를 얘기할 일도 없었을 거고, 그래서 내가 너에게 따릉이 얘기를 꺼낼 일도 없었을 테고, 그랬다면 너는 계속 따릉이 탈 생각은 못하고 비효율적인 이동을 반복했겠지. 그러니까 네가 오늘 버스를 놓친 건 결과적으로 아주 잘 된 일이야.
친구는 말을 이어갔다.
- 그러니까 '따릉이를 알았더라면'이라는 가정법은 잘못된 가정법이지. 왜냐면 따릉이의 존재를 비로소 자각한 건 지금이고, 불과 몇시간 전만 해도 따릉이는 네 머릿속에 아예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가정법은 이렇게 써야지. '따릉이 탈 생각을 진즉 했더라면'이 아니라, '버스를 놓치지 않고 그냥 탔더라면' 이라고 가정을 해야지. 하지만 그 버스를 탔더라도 어떤 결과가 생겼을지는 모르는 일 아니겠어?
버스는 떠났고, 나는 땀을 흘렸고, 따릉이를 알게 되었다. 결과 편향에서 벗어나니 몇 시간동안의 과정, 그 과정의 의미가 떠올랐다. 친구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긴다: 후회는 허상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