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터에게 마케팅해야 할 때

내가 누구인지 고객이 누구인지 아는 방법

by 슬기

퇴사 후 나를 찾는 곳이 많아졌다.

퍼블리에 웹북을 발행하고 브런치에 마케팅 관련 매거진을 쓰고 난 후 몇 건의 강의 제안과 외주 마케팅 의뢰가 들어왔다. 소셜 살롱 문토에서 진행하는 [마케터의 아지트] 모임도 그중 하나였다. 제안받은 건 8월이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오프라인 모임이 미뤄지면서 9월 말 첫 시작을 하게 됐다.


마케터의 아지트

'취향이 통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커뮤니티 플랫폼 문토는 마케팅, 브랜딩, 글쓰기, 드로잉 등 여러 모임을 동시다발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도 내가 맡은 [마케터의 아지트]는 현직 마케터로 일하고 있거나 마케팅 쪽에 관심 있고 배우려는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이었다. 그러니 나는 마케터들 앞에서 마케팅(=내 일)에 대해 논해야 했다.


발표라고 해봤자 회사에서 PT밖에 해본 적 없는 나인데, 지금까지 내가 어떤 일을 해왔고 그래서 이분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마케팅적으로 잘 어필할 수 있을까? 걱정되는 한편 이상하게 의욕이 불타올랐다. 왜냐하면 이것도 마케팅이었으니까. 지금까지 프로덕트에 열심히 가치 부여를 해왔다면 이제 나란 사람으로 대상을 바꾸기만 하면 된다. 생각이 이렇게 정리되자 마음이 편해졌고 가슴이 떨렸다. 발표 준비에 보다 박차를 가하게 됐다.


마케터의 아지트 Blue

결과적으로 첫 모임은 잘 끝마쳤다. 이날 함께한 분들 중 몇몇이 따로 긍정적인 피드백을 메시지로 보내오거나 또 다른 강의를 진행하는 게 없냐는 질문을 건네 왔다.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그렇다면 이 모임이 잘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란 사람이 특출 난 마케터라서? PT의 신이라서? 놉, 전혀 아니다. 철저히 마케팅적으로 사고했고 일을 할 때처럼 고객관점으로 바라보고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딱 두 가지만 생각했다.




첫째. 타입 폼을 통한 고객 세분화


어떤 분들인지 먼저 알아가고자
직접 단톡 방을 파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문토는 좀 신기한 게 모집은 주최 측에서 담당하되 직접적인 커뮤니티(단톡 방) 개설, 운영은 모임장으로 섭외한 사람에게 일임했다. 자율성을 줌으로써 구성원들끼리 허물없이 가까워지라는 취지였겠지만 모든 것이 처음인 내겐 조금 부담이기도 했다.


첫 모임 일주일 전, 대략적인 가이드라인과 함께 정원이 열일곱 명이라는 사실을 전달받았다.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했지만 내 손에 들린 건 이름과 전화번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톡 방을 개설했고 몇 마디 형식적인 인사말이 오간 후 곧바로 잠잠해졌다. 앞으로 내가 마주할 모임이 어떠할지 머릿속에 뚜렷하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생전 보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ppt로 어떤 말을 꺼내야 좋을지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타입 폼(Typeform)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분들이 어디 소속돼있고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며 이 모임을 통해 어떤 걸 얻어가고 싶은지 사전 학습 정보가 필요했다. 내게 꼭 필요한 정보들만 문항 별로 정리해서 타입 폼을 만들었고 모임 당일 오전에 단톡 방에 링크로 공유했다.


타입폼 일부 발췌


오후까지 약 50%가 설문에 참여했고 나머지 절반은 모임 장소로 오는 도중 또는 현장에서 직접 참여했다. 답변들을 읽다 보니 영리/비영리부터 시작해 그로스 마케터/ 퍼포먼스 마케터/ 브랜드 마케터/ 취준생/ 개인사업가 등등 생각보다 다양한 업종,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발표 시작 전 출석 체크를 하면서 사람들의 얼굴과 이력을 타입 폼 답변과 대조해가며 외웠다. 동일 직무에 종사하거나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은 묶어서 함께 기억했다. 덕분에 어떤 장표에서 어떤 사람에게 시선을 두고 이야기하면 좋을지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 발표 중간중간 Q&A를 받을 때도 저 사람은 나에게 왜 이런 질문을 할까?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고 빠르게 답변할 수 있었다. 궁극적으로 사전 FGI를 통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그 공간의 흐름을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



둘째. 고객 성향을 반영한 발표 개선


저희 고객들은 대화를 하고 싶어 해요
되도록이면 그분들이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갖게 해 주세요

고객들이 스스로 참여하는 걸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난 후, 미리 보낸 발표 자료를 모두 바꿨다. 거의 대부분의 장표에 다음과 같은 공란을 넣었다.

나는_____마케터다.

마케팅이란 _____이다.

답을 내리지 않고 알아서 생각하게끔 하는 질문을 해보자… 이게 적극적인 사람들을 위한 내 나름대로의 방안이었다.


고객 성향을 반영한 ppt 자료


그런데 현장에서 마주한 사람들은 예상보다 적극적이지 않았다. 원래는 공란을 채워 넣기 위해 돌아가며 한 마디씩 해보자 제안하려 했다. 그런데 다들 조용했다. 내향적인 성격이었을 수도 있고 첫 모임이라 어색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어찌 됐든 Flow는 전면적으로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면서 나는 _____마케터다. 말해보려 했던 애초 계획을 다음과 같이 바꾸었다.


"나는 _____마케터다. 결과적으로 여러분은 5주 후에 이 공란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마케팅은 기본적으로 문제 해결입니다. 회사 안에서의 문제를 해결해 일잘러 마케터로 자리매김하든지, 고객이 결제를 망설이는 이유를 해결해 프로덕트를 더 빛나게 하든지. 저는 이렇게 채워 넣었고 100만이 제가 뽑은 키워드예요(*나는 기업 소셜을 100만 채널로 만든 마케터다) 덕분에 저는 이러이러한 마케터로 브랜딩 됐고 여기 여러분들 앞에서 말하고 있죠. 스타트업 정신으로 임하세요. 나는 어떤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는지. 고객 페인 포인트가 뭔지. 제가 도와드릴게요."


무엇보다 지금 당장 공란을 채워 넣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걸 강조했다. 왜냐하면 내 앞에 있는 고객들은 그런 걸 원하지 않았기에. 적극적인 참여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일부러 대답을 강요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들은 방법을 찾고 싶어 했고 나는 그 방법을 찾는데 도움이 되는 인간이어야 했다. 모임 종료 기간인 5주의 텀에 대해 얘기했고 같이 찾아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모두에게 통용되는 정답은 없겠지만, 때로 좋은 질문은 질문 그 자체에 답을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있는 법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공란은 의미 있는 발화법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단 두 가지에만 집중했다.

고객이 누구인지 알고 어떻게 말해야 효과적일지 아는 것. 이를 해내기 위해 타입 폼을 통해 고객을 세분화했고 고객 성향을 반영해 발표 자료와 발표 내용을 전면 수정했다.


방법론적인 걸 다 떠나서 애초에 나란 사람을 마케팅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었던 것 같다. 나를 마케팅하지 못하면 비단 어떤 프로덕트도 마케팅하기 어려울 테니까. 좋은 마케터란 고객을 말하기 이전에 가장 먼저 프로덕트를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어떤 걸 꺼내서 어느 때 어떻게 던질지 효과적인 방법을 도출해낼 수 있으니까. 그게 제품이든 서비스든 무엇이든 간에 세상에서 내가 가장 잘 아는 대상은 나다. 그러니 마케터가 나도 마케팅 못한다면 무얼 마케팅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바라봤을때 마케터들 앞에서 나를 마케팅한다는 건 유의미한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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