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되어간다는 것

끝이 없는 엔드게임

by 슬기

2020년 7월 24일 금요일, 퇴사했다.

재직 중일 때는 퇴사라는 단어만 들어도 향수병이 일만큼 마음속에 수 없는 아련함 같은 것이 피어올랐는데 막상 퇴사할 때가 되니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다. 출근과 퇴근, 8층 코너만 꺾으면 바로 보이는 내 자리, 나를 둘러싼 사람들, 모든 것이 너무나 똑같은 하루였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자꾸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인수인계 파일 보고 정리해봤는데 한 번만 봐주세요."


사내 인트라넷으로 맞은편에 앉은 사원이 말을 건네 왔다. 다음 순간 다소 부끄러워졌다.


"너무 웃으시는 거 아니에요? 좋아 보이세요~"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야 말았다. 옆에 거울이 있다면 지금 당장 얼굴을 확인해봤을 텐데 아쉽게도 그때 내 책상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입을 다 가렸는데도 불구하고 손가락 사이로 자꾸만 삐져나오는 미소를 감출 길이 없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정말이지 너무 웃어서 입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마치 내가 조커가 된 것처럼 실없이 계속 웃기만 했다. 퇴사가 이렇게 쉬운 거였다니. 줄곧 묵혀왔던 감정들이 변기 물 내리듯 싹 내려가버리는 순간이었다.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정말 바닥까지 남김없이 최선을 다했고 한 치의 후회도 없었다.


퇴사일에 맞춰 크로스핏 회원권이 종료됐다.

이년 넘게 매일 갔던 운동하는 곳을 옮긴다는 건 퇴사를 말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체육관 바닥에 쏟은 땀방울만 모아봐도 작은 어항 하나는 채우지 않을까 싶을 만큼 점심시간마다 운동을 정말로 열심히 했다. 마지막 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출구를 나서기 전 함께 운동했던 분들과 짧게나마 작별 인사를 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서운해하고 아쉬워했으며 그 속에 둘러싸여 있으니 자꾸만 마음이 먹먹해졌다.


"성공해라. 꼭."


등 뒤에서 느닷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롤모델이라 생각하고 잘 따랐던 오빠였다. 뜬금없이 성공하란 말이 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렇게 말 안 해도 성공할 거야. 실패해도 어쩔 수 없지. 내가 선택한 거니까."


박스에서 빠져나오자 다행히 오전 내내 내리던 비는 멎어있었다. 장우산을 질질 끌며 회사로 돌아가는데 빗물도 아닌 것이 이상하게 볼을 타고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아쉬웠다.


'이렇게 매일같이 동기 부여되는 롤모델을 만날 수 있을까'

'루틴을 깨버리면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다른 곳에도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또 있을까?'


사무실에서 인수인계 파일을 정리하는 와중에도 자꾸만 운동하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좋은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나도 더 좋은 사람이 돼야겠다 다짐하게 됐다.




일, 운동. 일상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둘 모두를 깨끗하게 비워낸 후에야 나는 새로이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이직까지 남은 기간 단 3주, 그 안에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마무리해야 했다. 집에 틀어박혀 노트북과 씨름하며 3주를 보냈다. 해 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내내 읽고 쓰기만 했다.


퇴사 2주 차에 웹북이 발행됐다. 만우절날, 거짓말처럼 시작했던 웹북 초고를 다 써 내려갈 때부터 퇴사는 이미 예정돼있던 거였다. 기업 SNS를 100만 채널로 만든 마케터. 이 이상 배울 수 있는 일도 이 회사에서 더 이상 얻어갈 것도 없었다. 채널은 이미 성장했고 회사는 거대했으며 일은 무료했다.

내게 많은 인사이트를 건네준 책 『그로스 해킹』의 저자 라이언 홀리데이는 마케터에게 필요한 진짜 능력은 거대하고 따분한 회사를 1년에 1% 성장시키는 일을 돕는 것이 아니라 거의 없다시피 한 자원을 활용하여 맨 땅에서 완전히 새로운 브랜드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봤을 때 나는 정말 하루빨리 이직을 하고 싶었고 그 시기는 웹북이 발행되기 전이었으면 했다.


닥치는 대로 원서를 넣기 시작했다. 여섯 곳의 회사에 면접을 봤고 총 두 곳에 최종 합격했다. 그중 성장 가능성이 더 큰 스타트업을 선택했다. 입사하기 전에 웹북도 세상에 나왔다. 속이 후련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일 잘하는 마케터가 되는 게 꿈이었으니까. 5년간의 노력끝에 얻은 100만이라는 숫자는 회사 안에서도 밖에서도 유의미했다. 여기저기서 나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일도 많아졌다. 어디 어디의 마케터라기보다는 마케터인 누구누구로 커리어를 키워갈 수 있는 문이 열린 것 같았다. 이 문 밖에 뭐가 있을지는 이제 내가 만들어가기 나름일 테다.


문과 별개로 내게는 또 다른 갈래의 길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11월 중에 첫 종이 책이 출간될 예정이다. 좋아하는 운동인 크로스핏과 달리기를 하나로 묶은 힐링 에세이다.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얻은 3주라는 시간 동안 이 책을 퇴고하는데 내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때로는 머리를 쥐어뜯고 때로는 며칠 굶은 사람처럼 이 책, 저 책을 탐독했다. 한글 창에 커서 깜박이는 보면 입이 바싹바싹 말랐지만 반대로 잘써지면 그만큼 즐겁기도 했다. 정도면 부끄럽지 않겠다 싶어 탈고를 끝마쳤는데도 쓴 글을 다시 보면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많은 백스페이스를 눌렀는지 모르겠다. 이런 시간들 덕분에 한 권의 책이 완성됐다.


일 잘하는 마케터

꾸준히 운동하는 사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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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점차 내가 되어간다. 한 때는 정말 되고 싶었던 모습이 내게서 보인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되고 싶은 내가 된다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니까.

마케터로서의 나, 주 오일 운동하는 사람으로서의 나, 작가로서의 나. 모든 일을 다 해낼 수 없으니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고 (책 마무리 작업을 위해 일부러 퇴사 후 남은 시간 동안 운동을 연장하지 않았다) 정체되지 않기 위해 늘 성장하고자 노력해야 하며 (저관여 상품을 파는 대기업 마케터에서 고관여 상품을 파는 스타트업 마케터로 다시금 삽질하고 있다) 대운을 바라진 않지만 운이 언젠가 올 거라고 믿고 계속해서 나아가야 했다. (작년부터 공개된 곳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서 올해 출간을 하게 됐다) 힘들지만 좋아하는 일이고 체력이 좋아야 오래도록 좋아하는 일을 해낼 수 있으니까 계속해보는 것이다. 나는 쓰는 사람이며, 앞으로도 쓰는 사람으로 살 테니까 지금도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고.


첫 직장을 퇴사하고 처음으로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커뮤니티와 작별하면서 또 다른 나를 발견했듯 성인이 되어서도 환경 변화와 성장은 계속돼야하는 것 같다. 마치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변화하던 나의 환경, 나의 역할처럼. 계속해서 나를 발견하고 되고 싶은 내가 되어가는 것. 이건 아마 죽을 때까지 끝없이 반복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궁금하니까 그래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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