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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Oct 11. 2020

늘 길을 잃었습니다

맺음말

언제고 떠날 수 있는 마음으로 꼭 필요한 것들만 놔뒀던 게 책상이었다. 그렇게 꼬박 5년을 한 곳에서 일했다. 깨끗했던 회사 책상 파티션엔 형형색색의 마그넷이 붙어있고 그 아래엔 여행에서 사 온 스노우볼이 여럿 놓여있게 됐다.


일 년 전, 부서 이동으로 온 옆자리 대리가 그 주변을 아이언맨과 그루트 피규어로 장식할 때쯤, 나도 우리 집 냉장고에 붙어 있던 여러 나라 마그넷들을 하나씩 옮겨왔던 게 벌써 그 종류만 해도 스무 개가 넘었다. 그러니까 줄곧 모니터를 보다가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만 돌려도 미소가 절로 나오는 풍경이 바야흐로 펼쳐지게 된 것이었다.  


의자가 인생을 바꾼다.라는 어느 TV 광고처럼 앉은 자리에서,  미래를 바꿀  있단 말을 그즈음부터 믿게 됐다. 왜냐하면  시기엔 퇴근하고 홀로 책상에 앉아 지나온 여행지를 그리며 글을 썼기 때문이었다. '그때  좋았지, 다시 여행이나 가볼까?' 항공권 사이트를 뒤적거리기만 했던 내가 '그때  좋았지, 그런데 무슨 일이 좋았었지? 그걸 통해서 무엇을 알았지?'라는 생각을 하고 글을 쓰기 시작한    하고도 반이 지났다.


책상 위에서 필리핀 초록 바다가 넘실 거리고 독일 2층 집 창문 커튼 사이로 들어오던 햇빛이 느껴지는 느낌은 뭐라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글을 쓴다는 건 그러니까 다시 한번 여행을 떠나는 거였다. 그리하여 글로써 담아둔 여행은 공장에서 찍어낸 마그넷보다 더 매력적이고 더 자주 보고 싶은 기록이 됐다.


기록한다는 건 기억한다는 것과 다른 의미였다. 기억은 내가 상상하는 데로 얼마든 조작이 가능했지만 기록은 활자로 남아 그 자체가 하나의 사실이 돼버렸다. 최대한 잘 기록하기 위해선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했다. 구글 드라이브에 저장된 사진들을 여러 번 보고 난 후 그때의 풍경을 눈을 감고 그려보았다.


내가 맡았던 풀냄새, 내가 만났던 사람들의 용모와 인상착의, 유난히 가슴에 남던 말. 그것들을 하나하나 더듬으며 써 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소책자 분량의 에세이가 완성됐다. 인간이다 보니 이 책의 내용이 모두 정확한 기억이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쓰는 순간만큼은 정직해지고자 노력했다.

떠나지 않아도 여행하는 기분이라서 좋았다. 일 년 넘게 일상을 여행하는 기분으로 글을 썼다. 내게서 나온 글자들이 부디 생동감 있게 다가가 읽는 분들에게도 여행하는 기분이 됐으면 좋겠다. 끝으로 좋아하는 시집의 가장 좋은 순간을 함께 나누고 싶다.


우리가 함께 했던 순간들이

나에게는 여행 같은 것으로 남고

당신에게는 생활 같은 것으로 남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함께하지 못할 앞으로의 먼 시간은

당신에게 여행 같은 것으로 남고

나에게는 생활 같은 것으로 남을 것입니다.  


- 박준,「여행과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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