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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Mar 25. 2019

떠나지 않아도 여행하는 기분이야

다양한 방식의 여행

여행을 가고 싶은데 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무엇일까.


 ㅣ 솔직히 여행 다니기 어렵잖아. 돈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써야 되고   


언젠가 들었던 말처럼 아마 돈 또는 시간 때문이지 않을까.


실제로 해가 갈수록 여행을 다니긴 어려워진다. 직장인 때보단 학생이, 가정이 있을 때보단 혼자가 더 여유로운 게 여행이라는 걸 우린 모두 알고 있다. 그건 내가 만난 조안나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시절 세계를 누볐던 프로 여행자 조안나는 이제 30대 후반이 됐고 어딘가에 정착해야 할 나이가 됐다. 조안나는 그곳이 타지보단 자기가 나고 자란 도시가 되길 바랬다. 내가 잘 알고 있고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곳. 그래서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조안나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여행했다.


 ㅣ 나는 말이야. 이렇게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게 너무 좋아. 이게 아니었으면 내가 널 어떻게 만났겠어. 네가 사는 도시를 안 가봤지만 네 얘기를 듣고 너를 보면서 마치 가본 것 같아. 난 이게 바로 여행 같아.


조안나가 이 말을 했을 때 불현듯 어떤 문장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언젠가 어느 날에 내가 정말 잊고 싶지 않았던 가치를 떠올리게 하는 문장이었다.

 

 여행, 여기서 행복할 것.


굳이 많은 돈을 쓰지 않아도 굳이 많은 시간을 소요하지 않아도 그녀는 충분히 이곳 포르투에서 전 세계를 여행하고 있었다. 그것도 자기 재능으로 돈을 벌면서 말이다. 여행은 곧 소비라고 생각되는 통념이 생산으로 바뀔 수 있다는데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조안나가 스냅사진을 찍는 풍경

나는 조안나에게 일주일에 몇 번 이렇게 에어비앤비 스냅 워킹 투어를 하는지 물었다. 조안나는 핸드폰으로 캘린더를 확인하더니 지난주는 한 주도 빠짐없이 진행했다고 답했다. 비수기도 있긴 하지만 요즘은 성수기라고. 바로 어제 촬영한 독일 친구 사진을 보여주었다.


ㅣ 이 친구도 혼자 온 여행자인데 베를린에서 대학원을 다닌다나 봐.


조안나가 보여준 사진을 한 장 두장 넘기다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혹시 나 말고 또 다른 한국인을 만난 적 있는지 조안나에게 물었다. 네가 두 번째야. 조안나는 잇몸을 드러내고 웃더니 아주 예전에 결혼을 앞둔 한국 커플이 자기를 찾았던 일화를 소개해주었다. 한국 남자는 여자 친구에게 프러포즈를 하고 싶다며 조안나에게 미리 메일로 부탁을 했다. 포르투가 한눈에 보이는 수도원 전망대에서 프러포즈를 하겠다고.

조안나는 여자 친구 시선을 돌리기 위해 연신 사진을 찍었다. 한국 남자가 화장실을 다녀오는 척 화사한 꽃을 들고 나타났다. 놀란 여자 친구 앞에 무릎을 꿇고 준비한 꽃을 건네면서 나랑 결혼해줄래? 포트와인처럼 달달한 말을 꺼내놓았다.


 ㅣ 한국 남자는 세상에서 제일 로맨틱한 것 같아. 엘레나. 진짜 다른 한국 남자들도 그래?

 

침을 튀겨 가며 한국 남자를 칭찬하던 조안나가 돌연 눈을 빛냈다. 나는 어색한 미소로 응답했다. 남자 친구가 없어서 잘 모르겠는걸. 두리뭉실하게 답변을 넘겼지만 조안나의 상상은 끝나지 않았다. 한국 남자는 착하고 배려심이 깊을 것 같아. 그녀 마음속에는 이미 한국 남자=로맨틱이라는 일반화의 오류가 자리매김한 것 같았다. 나 또한 애써 그녀의 달콤한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다. 한국 남자에 대한 환상이 나중에 조안나를 내 나라로 이끌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ㅣ 한국 남자는 좋은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엘레나는 왜 남자 친구가 없지?


정말 왜 그런지 모르겠다며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는 조안나에게 그게 바로 일반화의 오류 때문이야.라고 말할 순 없었기에 농담조로 대답했다.


 ㅣ 이것도 내 카르마가 아니겠니?

 

조안나는 낄낄 웃으며 한국 정말 가보고 싶은 나라라고 화색을 띠었다.  좁고 아기자기한 포르투 골목길 어귀에선 웃음소리가 한참 동안이나 끊이지 않았다.


 



 ㅣ 올라(Ola)


이제 막 환기를 시키려 현관문을 열고 나온 할머니가 저만치서 조안나를 보고서 반갑게 인사했다. 워킹 스냅 투어를 하는 동안 벌써 세명의 사람이 이렇게 조안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현지 토박이인 조안나 덕분에 나 또한 그녀 옆에서 올라(스페인어로 '안녕', 포르투갈에서도 '올라'를 인사 언어로 사용한다)를 열창했다. 에어비앤비 트립이 없었으면 내가 어떻게 이런 현지 친구와 포르투 골목 구석구석을 누빌 수 있을까.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드는 순간이었다.


ㅣ 엘레나, 난 사실 돈 벌려고 이걸 하는 게 아니야.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하고 사진 찍는 것도 좋아하니까 이걸로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가는 거지.  

 

 조안나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내 마음에 어떤 깊은 울림을 주었다.


ㅣ 한국도 가고 독일도 가고 여기서 여행을 하는 거야. 왜~ 여행 가면 새로운 사람 만나고 그렇잖아?


내리쬐는 강렬한 햇빛 때문인지 조안나가 왜 이렇게 눈이 부신 건지. 멋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보다 싶었다.  


사실 나는 일상을 정말 여행하는 것처럼 살고 싶은 사람 중 한 명이다.  항상 자유롭길 원하지만, 또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미생이기도 하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출퇴근, 서울의 일상

퇴사하고 떠난 세계여행

서른, 결혼 대신 야반도주


저런 자극적인 제목들에 끌리지만 막상 이렇게 무모한 도전을 행하진 못한다. 여행이 견문을 높이고 내 안에 많은 걸 바꿔놓는 걸 인정하지만, 여행을 다녀온 이후에 뭐 해 먹고살지 현실적인 고민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이가 서른 즈음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더더욱 그러했다. 해가 갈수록 이미 가지고 있는 걸 포기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에는 너무 무모하단 생각이 짙어졌다.


     

ㅣ 나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하고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해. 나는 내 삶을 사랑해.  

 

그래서 조안나가 더 멋있었다. 앞으로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것 같달까. 자기의 뿌리는 나고 자란 땅 포르투에 우두커니 박혀있되, 곳곳에 가지를 뻗어내는 그녀를 보면서 세상엔 다양한 방식의 여행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떠나지 않아도 여행하는 기분이야.

 내가 그리도 원했던 일상을 여행하는 것처럼 산다는 건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부럽다고 말하자 조안나가 당황해하며 마지막 스트라이크를 날렸다.


ㅣ 엘레나, 인생은 짧아. 네 삶을 사랑하렴.



 <이 글은 두 번째 이야기에서부터 이어지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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