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함으로 증명하는 나의 가치
막상 사람들 앞에 서서 내 의견을 전달하거나 발표할 때면 혼자 시뮬레이션할 때와는 달리, 문구를 입에 머금고 있다가 막상 말로 내뱉고 나면 갑자기 숨이 턱 막힐 때가 있다. 아니면, 불현듯 감정적인 동요가 몰아쳐 울컥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 이는 마치 스포츠 선수들이 겪는 ‘입스 현상’과 비슷하다. 메이저리그 투수 스티브 블라스는 8시즌만에 100승을 달성할 정도로 한때 유망한 선수였지만, 돌연 원인 모를 제구력 난조를 겪으며 3년 뒤 충격의 은퇴를 하고 말았다. 이처럼 긴장감이나 압박감 같은 심리적 요인이 운동선수의 퍼포먼스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스티브 블라스 증후군’ 또는 ‘입스 현상’이라고 한다.
물론 내가 원래 언변에 능하거나 말을 조리 있고 설득력 있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프로 스포츠 선수들이 겪는 심리적 압박과 감히 비교하기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자기표현을 할 때면 내 의지나 의도에 관계없이 발생하는 입스 현상을 요즘도 자주 겪는다. 그래서 때로는 좋은 경험으로 주변에 무엇인가를 추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다가도, 자칫 설익은 말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잘못 호도될까 봐 걱정부터 앞서곤 했다.
예전에는 행위의 결과를 과정보다 중하게 여기다 보니 나의 결과가 만족스러우면, 남들도 당연히 그러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와 돌이켜보니, 첫걸음에 지나지 않았던 시도를 난 마치 끝인 양 단정 지었던 것 같다.
또한, 행위의 결과에서 오는 내면의 허무함은 숨길 수 없었다. 합격 통보로 인한 찰나의 도파민과 희열감보다는, 그동안의 꾸준함이 증명됐다는 당연한 안도감이 날 더 안심시켰다. 끊임없는 의심과 내부 투쟁 속에서 내가 잘하고 있음을 스스로 입증했으니 말이다. 돌이켜보면 어떤 목표든, 이를 향한 고된 과정을 몸과 마음이 기억하면서, 나를 단단한 자존감으로 지탱해 주는 것 같다.
서두가 길어졌는데, 이번 글부터는 직장 생활 중 일과 외 시간을 활용해 대학원까지 마친 다양한 경험들을 풀어보고자 한다. 사실 은근히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지만, 막상 다수 앞에 설 때마다 입스를 겪는 스스로를 보며, 자기표현의 한계를 느꼈고, 외적으로 나를 드러내기보다는 내면을 강화하고 객관적인 지표로 증명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학습과 자격증 취득에 이르게 된 것 같다.
2016년 당시에는 신규 부서로 갑자기 이동하여 적응하는 기간이라 업무 로드가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자료 작성부터 증명, 발표까지 스스로 진행하는 업무가 많다 보니 사람 간의 업무 스트레스는 좀 덜하긴 했었다. 이 시간을 활용해 일과 후 사무실에 남아 자격증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때 흔히 미국기술사(PE, Professional Engineer)라 불리는 라이선스를 준비했다. 이 또한 한국 기술사처럼 분야가 다양하게 세분 되어 있는데, 난 전공에 맞춰 기계분야 중 Thermal & Fluid를 준비했다.
요즘은 챗GPT나 다양한 후기들이 넘처나지만, 당시에는 시작도 하기 전에 라이선스 등록을 위한 Reference를 어떻게 구할지부터 많이 고민했다. (참고로 미국 주(州) 등록을 위해서는 내 경력을 증명해 줄 다른 PE들의 Reference가 필수적이다.) 다행히 PE 시험 전 FE(Fundemental Engineer)는 4년 전쯤 취득했기에 바로 PE 준비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 말인 즉 PE 자격의 존재를 예전부터 알았지만, 그 기본자격이 되는 FE를 마치고도 4년이라는 시간을 유수처럼 흘려버린 뒤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텍스트북 하나만 보던 난 정공법으로 챕터별 ‘도장 깨기’로 시작했지만, 사실 책을 보면 거의 백과사전 수준이다. 또렷이 기억나진 않지만, 초반 FE 수준의 기초 수학이나 역학 챕터들과 Plant Engineering 같은 챕터는 제외하고, Thermal & Fluid 세부 분야에 맞춰 관련 챕터만 여러 번 봤었던 것 같다. 당시 내 수준은 해답을 보지 않고는 예제를 풀 수 없을 정도였는데, 같은 문제를 한 3번쯤 마주하니 어느 정도 외워지기도 하고 요령도 생기는 듯하였다.
거진 매일 저녁에 남아 있으면, 같은 층에 나처럼 공부하시던 동료분이 한 분 계셨는데, 우연히도 나와 같은 시험을 준비하셨다. 이후 서로의 러닝메이트가 되어주니 확실히 쉽게 지치지 않고 끈기를 가질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굳이 뭐하러 그렇게 늦게까지 공부했나 싶지만, 당시에는 그 자격증이 내 인생을 바꿔 줄 거라고 믿었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17년 4월쯤에 시험을 패스하고, 학력 검증, 주(州) 등록을 거처 거진 9월쯤에야 라이선스 등록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사실 대학교에서 제공하는 학력검증을 위한 전공과목별 영문 Description도 너무 부실하여, 스스로 보완하고 학교에서 다시 확인받는 수고로움이 있었지만, 다행히 대부분의 학점이수를 증명받았다. 당시 영주권 없이 등록가능한 주가 오레건, 켄터키, 텍사스 주였는데, 탑티어 건설회사나 오일 메이저들의 본거지인 휴스턴이나 오스틴 쪽이 마냥 좋아 엉겁결에 텍사스 주에 등록을 요청했었다.
공채로 입사한 나 같은 직장인들은 Reference나 Peer review에 대해 대체적으로 무지한 편이다. 하지만, 해외 대학원이나 기업 구직 서류를 볼 때면 심심찮게 현직 동료를 아는지 묻는 경우가 왕왕 있다. 직책자의 마음을 얻기도 피곤한 일인데, 동료들의 신뢰까지 얻어야 하는 Reference 제도는 정성적 지표로서 필수적이라, 당시 내 좁은 인간관계를 시험받는 이 순간을 순탄히 넘기기에 녹록치 않았다.
Reference 외에도 경력 기술서(SER, Statement of Experience Record)를 작성하는 것은 거의 취업용 자소서 쓰듯이 힘들었지만, 그 고생이 이후 대학원 학업계획서(SOP, Statement of Purpose)나 현재 CV(Curriculum Vitae)를 스스로 작성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지금 다시 읽어보면 손발이 오글거리지만, 그때는 그게 전부였고 진심이었다.
필기 합격 이후에도 최종 등록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참고로 텍사스 주 PE는 매년 갱신이 필요하며, 계속 교육이나 윤리 준수 측면에서 자가 교육을 주 Board에서 요구 시 이를 증명해야 한다. 랜덤식으로 Audit 대상자가 선별되므로, 제대로 준비 안 했다가 운 나쁘게 걸리면 낭패를 볼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필자도 이미 한번 걸렸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듯, 자격증 취득 그 자체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어제와 같은 하루이고, 그간 지난한 학습이 종결되어 여유가 좀 더 생겼을 뿐, 목표 달성을 위해 상상해 왔던 극적인 순간이 당장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국내에서 미국 기술사는 영미권 건설 사업이 많지 않다 보니 중요도가 썩 높지 않았다. 오히려 공공 입찰 PQ(Pre-Qualification) 통과나 책임기술사 제도에 따라 확보가 필요한 국내 기술사의 가치가 더 높게 평가되곤 했다.
그러나 목표 달성 이후 학습의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은 허무함이나 무료함만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두 번째 목표를 설정하고 준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첫 번째 경험을 통해 얻은 자신감이나 개인 능력도 때문도, 단순히 운이 좋아서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공부할 환경과 습관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운동과 마찬가지로 습관화된 학습 패턴이 가져오는, 느리고도 묵직한 ‘엉덩이 힘’이 바로 그 결과이다. 그래서 난 습관을 잃어버리기 전에 서둘러 국내 기술사 준비를 시작하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