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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헨님 Oct 02. 2019

아주 옛날의, 지난 연애가 주는 힘

사랑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여고생일 때 사귀었던 남자친구에게 아무 생각 없이 연락을 했던 건 나였다. 난데없이 훈아, 어디야? 하고. 그런데, 얘가 늦은 밤에 갑자기 전화를 걸어오면 하나도 안 반가웠다. 왜 이래, 이 시간에. 얘는 내가 남자친구가 있는 것도 알고. 그때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지고 더 이상 서로 어찌할 여지가 없다는 것도 너무 잘 알 텐데.


-역시 애인 있는 여자는 바쁘네, 전화도 안 받고.

-너는 연애 안 해?

-나이 먹으니까 만날 구실이 안 생겨.

-너 이제 안 멋있나 보구나...


가볍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던 건, 오래 질리도록 만나다가 헤어지지 않았던, 짧고 산뜻한 지난 애인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10대 시절 그 마음이 좀 애틋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같은 과외 선생님한테 수학을 배웠는데, 오며 가며 교복 입은 얘를 마주칠 때마다 빤히 바라봤던 걸 얘도 느꼈을 것이다. 나는 그때도 수줍음보다 자신감이 훨씬 큰 당돌한 여고생이었다. 까만 뿔테를 쓰고, 옆 동네 남고에서 공부 잘하는 특별반에 속해 있다고도 하는 것 같고, 엄마가 꽤 유난스럽다고 하더니 교복 위에 걸친 후드 재킷 같은 게 꽤 비싼 브랜드의 것이었다. 딱 봐도 좀 관리를 받는 듯한, 곱게 자란듯한,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은 만큼 마음이 순수한 남자애 같았다. 내 눈에 쏙 들었으니, 언젠가 기회를 만들어 친구가 되어야지 했다.


“안녕? 나 너랑 같은 과외 다니는 앤데, 너 왜 요즘 안 나와?”


인사도 한 번 안 하다가, 얘가 몇 주 안 보이기에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과외 집에는 공용 컴퓨터가 한 대 있었는데, 얘가 로그아웃한 기록이 있어서 아이디를 알고 있던 참이다. 얘도 이미 날 알았다. 우리 학교에 중학교 동창 여자애가 있어서, 나에 대해 물어보기까지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랬으면서, 내가 먼저 말을 걸게 하다니.  


메신저로 대화를 하다가, 어느 날은 만날 약속을 잡았다. 먼저 도착해 놀이터에서 얘를 기다렸던 저녁, 수업 중에 몰래 문자를 주고받던 것, 야간 자율학습 때 에이포 용지에다가 빽빽하게 썼던 편지, 빈 운동장에 앉아 내가 쓴 편지를 읽어 줬던 일. 그 편지를 다 읽고 보니 옆에서 울고 있던 얘를 발견했던 것. 그런 날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어릴 때부터 달콤한 연애를 꿈꿨고, 나만의 짝이 생기면 얼마나 든든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참 빨리 알았다. 후배들이랑 얘기할 일이 생기면 매번 말한다.


연애를 해야 돼. 그러면 어떤 일도 이겨낼 수 있게 돼.


회사 생활을 하고 여자 선배의 은근한 괴롭힘을 겪은 날들도 있었다. 미운 생각이 가득한 기 센 여자에게 하녀 근성 같은 걸 발휘해서 예쁨 받을 이유가 없었다. 좋아하는 선배들에게는 내추럴리 튀어나오는 애교와 적극성이 발휘되었지만, 절대 그렇게 해줄 수 없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때는 현 남친과의 연애 때문에, 하나도 데미지가 없었다. 퇴근을 하고 남자친구를 만나면 마음이 다 녹았다. 점심시간에 살짝 빠져나와 함께 밥을 먹기도 했고, 그러면 오후 일과 내내 힘이 폴폴 났었다.


18살의 훈이는, 교복을 입어도 멋지고 주말에 사복을 입고 만나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만큼 단정하고 훈훈했었다. 얘를 떠올리면 그런 예쁘고 파릇한 장면들만 기억에 남아서 기운이 돋는다. 서로 다른 교실에 앉아 있다가 교복을 입은 채로 만나서, 모두 집으로 돌아간 남의 학교 교문을 살짝 넘어서, 좁은 세상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매일 이렇게 살다가 언제 어른이 될까 지리한 시간을 손을 꼭 잡고 견뎌냈었다. 알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좁았는지 먼 미래를 끌어다가 얘기할 줄도 몰랐었다. 너는 어느 대학에 갈 거야 그런 것도 묻지 않고 나중에 어른이 되면 결혼을 할까 하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새로운 내 편이 생겨서 참 좋다, 오늘 야간 자율학습도 너무너무 지겨웠는데 널 만나니 마음이 다 개운해, 그런 얘기만 나눴던 것 같다.


애인이 마구 귀엽고 사랑스러운 순간을 미루지 않고 소리 내어 칭찬하는 일이 무엇보다 먼저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 감정이 언젠가 무뎌질까 걱정하지 않고. 돌아가서 바꿀 수도 없는 과거 때문에 다투지 않을 것. 무엇보다 힘든 일과를 마치고 마주 보고 함께 맛있는 것을 먹을 순간을 떠올리면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다!

10년도 더 된 오래된 것과 현재 진행형인 관계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가장 위대하다.


You complete me!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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