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묘 Oct 03. 2022

청년이 그냥 기차표를 사 주었다.

인도 첸나이

내 가장 큰 바람은 책을 한 권 갖는 것이었다. 
절대 끝이 나지 않는 이야기가 담긴 긴 책. 
읽고 또 읽어도 매번 새로운 시각으로 모르던 것을 얻을 수 있는 책. 
 <파이 이야기> 얀 마텔

밤 새 읽었다. 

너무 아쉬워 배 위에 책을 올려놓고 잠을 청했다. 

이렇게 남인도 여행이 시작되었다.


씻지도 못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땀 냄새 때문에 나도 괴롭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미안했다. 

첸나이 공항에 내리자마자 화장실로 갔다. 

세수를 하고 몸도 좀 닦았다. 

수화물을 찾으려고 보니 내 짐만 덩그러니.

그리 느린 인도인이 이렇게 빨리 떠나다니.

공항에서 나와 티루술람 역을 찾았다. 

삐끼들이 자꾸 반대 방향으로 알려주어 왔다 갔다를 여러 번. 

겨우 찾았는데 기차표를 살 루피가 없다.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에게 환전소를 물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아저씨가 1Km를 가야 있다고 했다. 1Km 정도는 가깝다는 듯이. 

해가 지고 있었다. 갔다 오면 깜깜해질 것이고. 

게다가 나에겐 무거운 짐이 있는데. 인도의 길이 과연 평평할까? 

나는 청년에게 부탁해 보았다. 1불을 줄 테니 루피를 좀 달라고. 

청년이 그냥 기차표를 사 주었다. 

가방 속 과자를 꺼내 선물하려고 하니 괜찮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있다니! 여기 인도가 맞습니까?

청년 덕에 여성 전용 칸에 올랐다. 

짐이 한가득인 여자들이 바닥에 빼곡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좁은 틈을 헤치고 먹거리나 담배를 파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지나갔다. 

기차는 느리고 더럽고 복잡하고. 

닫히지 않는 커다란 문 밖으로 스치는 풍경이 삭막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쓰였을 법한 기차에 타고 보니,

왜 또 인도에 왔나, 후회가 밀려왔다.

에그모어 역에 환전소가 있다고 했다. 

내려서 보니 깜깜한 데다가 역 주위에 무언가 있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센트럴 기차역으로 가야 했다. 

가는 기차를 찾느라 헤맸고. 다행히 한 아저씨가 도와주셨다. 

파크 역에서 나와 길을 건너 센트럴 기차역으로 들어서는데, 

엄청난 인파가 길을 꽉 메우고 있었다. 

여기 인도구나, 인도가 맞구나!

주위는 온통 공사 중이었고. 

사람들에 휩쓸려 폭탄이 떨어진 듯한 광장을 지났다. 

어렵게 도착한 센트럴 역에서 또 환전소를 찾느라 헤맸다. 

계단이 너무 많았다. 어디나 사람들로 가득했고. 배가 고팠다.

결국 ATM에서 돈을 찾았다.


벵갈루루행 밤 기차를 기다렸다.

1층 에어컨 룸은 샤워기가 고장 났다고 한다. 

온몸이 끈적끈적하고 옷에서 땀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또 땀이 또르륵 속옷으로 흘러내렸다. 

어디서 쉴까 고민하다가 2층 여성 전용 리타이어링 룸을 찾았다. 

이상하게 돈을 받지 않았다. 

화장실은 몹시 더럽고. 샤워장은 잠겨 있었고. 

샤워를 포기하고 졸았다. 

그 와중에 달게 잠을 자는데 모기가 자꾸 괴롭혔다. 

잠에서 깨어 시계를 보니 기차 출발 1시간 전. 

여자들이 파우치를 들고 지나갔다. 

파우치! 세수라도 하려고 화장실을 살폈다. 

더러운 물이 세면대에서 내려가지 않고 있었지만.

세면대 중 하나가 멀쩡했다. 여기서 씻자. 

그때 잠긴 줄 알았던 샤워장 문이 열렸다. 누군가 씻고 나온 것. 

샤워장에는 낡은 수도꼭지 밑에 빨간 플라스틱 대야가 있었다. 

창고 같았지만 몸도 닦고 옷도 갈아입을 수 있었다. 

문을 꼭 잠그고 나니 안 그래도 침침한 샤워장이 더 어두워져 무서웠다.

처음에는 후다닥 윗도리만 닦았다.

물을 조금씩 끼얹자 샤워장 상태가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그래서 샤워를 했다. 오, 축복! 축복이었다.

밖에 있던 짐이 걱정됐지만 다행히 무사했고.

씻고 나오니까 힘이 솟았다. 

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빗었다. 체조로 마무리. 재충전했다.


기차를 타기 위해 나섰다. 

계단을 내려오니 바로 앞 플랫폼에 기차가 서 있었다. 

1등석은 맨 뒤였다. 1등석이 왜 이리 먼 것인지?

설국열차인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묻고 15분은 걸어 기차에 탑승했다. 

예약해 둔 좌석까지 찾고 나니, 감격. 

비행기를 놓치지 않았고. 초저렴 대중교통으로 야간 기차에 무사히 올랐다. 

돈도 좀 있겠다. 마음이 놓였다. 


침대칸 이층은 너무 더웠다. 

샤워한 보람도 없이. 또 땀을 흘리나 했다. 

기차가 출발하자 에어컨 때문에 코가 시렸다. 

방향을 바꾸어도 얼굴에 엄청 센 바람이 곧바로 쏟아졌다. 

이렇게도 가리고 저렇게도 가리며 괴롭게 잤다. 

일어났더니 목이 따끔, 감기 오려나.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에어컨 바람 나오는 구멍. 뒤집어 놓으면 되었다. 

이걸 몰라 그리 추웠구나. 

인도 기차가 처음이 아닌데 왜 이리 서투른 것일까! 

새벽에 깨서 정신이 말똥 해졌다. 

짐 보관소는 잊자. 

새벽에 벵갈루루에 도착하면 숙소를 얻자. 씻고 세 시간쯤 쉬자. 

시내로 나가 환전을 하고 시티 투어. 다시 숙소로 돌아와 씻자. 

밤 기차를 타고 함피로 가자.


도착 예정 시간에 가방을 챙겨 복도로 나갔다. 

한 시간 연착이라는 말을 듣고 다시 기차 안으로 돌아와 앉았다. 

가장 두려워하던 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전 06화 식당 맞은편에 독수리가 앉아 나를 노려보는 나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