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드라마 <연애시대>를 다시 본 소회
연애시대, 로맨스가필요해2 그리고 나의아저씨.
주기적으로 정주행하는 내 인생드라마 베스트 3이다.
이 목록만 봐도 어떤 류의 드라마를 좋아하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중 단순한 드라마 취향을 넘어 연애관이며 이성관에까지 영향을 미친 내 인생 첫 드라마는 연애시대였다.
여느 여자들이 그러하듯 키가 크고 몸이 좋은 중저음의 남성을 선호하는 내가 키 170cm 될까 말까한 염소 목소리의 왜소한 중년 감우성에게, 아니 극중 동진에게 몰입하게 된 것은 기적에 가깝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결혼에 대한 뒤틀린 환상을 가졌던 내게 이혼한 부부의 시점에서 시작되는 도입부는 신선한 충격이었고 손예진은 너무 예뻤다.
그래, 손예진이 예뻐도 너무 예뻤던 게 문제다.
지금도 여전한 아름다움으로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무려 현빈을 남편으로 맞아 행복을 누리고 있는 그녀지만 연애시대 촬영 당시의 손예진은 보통의 미인 수준이 아니다.
또렷하게 조각한 이목구비에 젊음과 싱그러움이 더해져 그야말로 청량함을 인간의 형상으로 빚어낸 듯한 그녀가 전남편과의 해결되지 않은 상처에 아파하며 눈물 한 방울을 떨구면 그 어떤 스토리에도 개연성이 생기고 만다.
나는 그렇게 예쁜 은호(손예진의 극중 이름이 은호다)에 감정이입하여 동진을 사랑했고 그들 이혼 남녀가 인연의 굴레를 돌고 돌아 결국 다시 서로에게 이를 때까지 함께 마음 졸이며 울고 웃었다.
지난 주말, 대청소를 마치고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에 OTT 채널을 둘러 보다가 연애시대를 발견하곤 추억에 젖어 재생을 눌렀다.
내 최애 인생드를 정주행하며 무료한 시간도 보내고 이제는 사라져버린 몽글한 감성도 다시 꺼내어볼 생각에 잔뜩 기대를 했었는데 이게 웬걸, 지금의 나는 도대체가 이 드라마에 몰입할 수가 없었다.
'이혼녀라고 하면 남들이 쉽게 본다'거나 '예쁘지도 않은데 스토킹을 왜 당하냐'는 시대착오적인 대사들 때문만은 아니다.(실제로 이 대사들이 나에게 하는 말인듯 해서 적잖이 충격을 받기도 했다만...)
지금의 나는 극 중 은호와 같이 이혼을 경험한 사람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호와 달리 이혼한 전남편을 여전히 사랑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할 수 없을 때 인생 드라마는 그냥 드라마가 된다.
나를 울리고 웃겼던 수 많은 에피소드들이 이제는 그저 이혼을 글로 배운 작가가 쓴 현실성 부족한 시나리오가 되어 버린다.
내가 은호고 은호가 나인 양 물아일체가 되었던 시간은 사라지고, 예쁘고 어리고 애가 없어서 재벌2세 연하남의 대쉬를 받는 손예진과 애만 없지 예쁘지도 어리지도 않아서 혼자 노는 현실 이혼녀인 자신이 분리된다.
이혼을 통해 얻은 것이 훨씬 많고 행복하기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잃은 것이 하나쯤은 있었다.
이혼은 내 인생 드라마 연애시대를 빼앗아 갔다.
다시는 화면 속 은호와 동진을 보며 진짜 사랑에 대해 궁금해 하고 설렐 일 역시 없을 테니 상처가 없던 시절 간직했던 어린 날의 순수 역시 이혼에게 뺏긴 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