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한 비비안웨스트우드와의 작별
스타킹에 구멍이 났다.
몇 년 전 일본 여행을 갔을 때 사온 비비안웨스트우드 스타킹이다.
가격이 조금 비싸기도 했지만 패턴이며 색감이 독특해서 포인트를 주기 좋아 아끼던 스타킹이었다.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조그맣게 났던 구멍이 버리기 아까워 억지로 신고 다니는 동안 점점 넓어진 바람에 이제는 거지 왕초마냥 발가락이 다 나온다.
몇 년 동안 구멍난 스타킹 하나 버리지 못했던 이유가 뭘까?
다시 구하기가 번거롭다거나 스타킹 주제에 가격이 비싸서는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직구를 통해 금세 구입이 가능하고 비싸봤자 스타킹이다.
만약 다시 새 것을 산다면 동일 제품보다는 다른 스타일을 선택할 것 같으니 이 스타킹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애착이 생긴 것도 아니다.
그저 귀찮은 미련이었을 뿐이다.
딱히 간직하고 싶지도, 그렇다고 한 번에 버리기도 애매한 그저 그런 미련.
예뻤던 시간이 생각나 구멍이 났는데도 꾸역꾸역 신고 다녔지만 굳이 반짇고리를 열어 깁거나 천을 덧댈 만큼의 애착은 없었던 거다, 결국.
어쩌면 나는 작게 난 구멍을 방치한 채 구멍이 저절로 커져서 내가 이 스타킹을 '버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버릴 수 밖에 없을' 때를 기다려 왔는지도 모른다.
이제 와 내 손으로 버리자니 아깝기도 하고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행위는 그것이 무엇이든 행위자를 망설이게 하는 법이니까.
주말에 핸드폰 청소를 했다.
내 핸드폰 안에는 별의 별 것들이 다 들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무심한 편이라 지나간 사진을 다시 들여다 본다거나 이미 끝난 대화를 복기하는 습관이 없어 쌓여 있는 사진만도 수백, 수천 장에 카톡 대화 리스트는 끝도 없이 스크롤이 내려간다.
제일 먼저 결혼식 날의 사진을 통째로 지우고 신혼 여행 사진도 아깝지만 지웠다.
(생전에 몰디브를 언제 또 가 볼 수 있을까!)
즐거웠던 시절 나누었던 모든 대화들과 서로의 마음이 강퍅해진 이후 주고 받았던 날선 말들, 그리고 혹시 모를 법정 공방을 위해 남겨 두었던 몇 명의 가해자들과의 대화방도 싸그리 정리했다.
놀랍게도 슬프거나 센치해지지는 않았다.
훨씬 어릴 적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사진첩을 지우고 대화를 삭제할 때는 이보다 더 마음 아프고 감상에 젖어 눈물도 한두 방울 떨어뜨렸던 것 같은데, 너무 쉽게 핸드폰에 남은 모든 흔적을 간단히 삭제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헛웃음이 났다.
그 시간, 그 기억 속 내 젊은 모습이 그리우면 어쩌지 하는 작은 망설임조차 없었다.
어차피 그 때보다 외모적으로는 지금이 낫다.
그리고 다시 봐도 행복한 추억이 아니라 한심한 기억일 뿐이다.
구멍난 스타킹을 벗어 쓰레기통에 휙 던져 넣었다.
그렇게 내 마음 속 구멍난 미련도 모두 털어낸 기분이 몹시도 홀가분하다.
의식조차 하지 않고 살 만큼 괜찮은 줄 알았는데, 늘 쥐고 다니던 핸드폰 속 기억들이 발바닥에 눌러 붙은 타르마냥 무의식 중에 내 걸음을 질척이게 했었나 보다.
언젠가 인스타에 적었던 글귀를 다시 꺼내어 보며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또 한 걸음, 자유로운 행복을 향해 걷는다.
추억은 늘 그렇듯 아무 힘이 없다.
시간은 모든 것을 빛 바래게 한다.
마음은 원하는 만큼 전할 수 없다.
세상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