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놂작가 Jul 31. 2022

카레라이스 위크

기운 센 을지로입구 식탐러의 워크&푸드 로그

2년 만에 카레를 먹었다.

처음은 회사 근처의 아비꼬.

그간 카레를 멀리 하느라 자연히 주에 두어 번은 점심 메뉴로 즐겨 찾던 아비꼬 역시 근 2년 만의 방문이었다.

항상 주문하던 허브치킨 카레라이스 1단계에 대파, 마늘, 소세지 토핑을 추가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다.

녹진하게 끓인 매콤한 일식 카레를 듬뿍 떠서 고소하고 바짝한 마늘칩과 함께 든 첫 술의 감격이 여즉 생생하다.

먹음직스럽게 칼집을 내어 알맞게 구운 커다란 소세지를 뽀드득 깨물어 한 입에 넣고 천천히 씹자 소세지의 육즙과 표면에 묻은 카레 소스로 입 안 가득 풍미가 번진다.

그간 카레  없이  오래도 견뎠어, 되뇌이는 마음이 짐짓 뭉클하기까지 하다.


이번 주는 스스로 선포한 카레라이스 위크였다.

점심으로 아비꼬를 실컷 즐기고도 집에 오는 길에 슈퍼마켓에 들러 양파, 감자, 버섯 그리고 스팸과 오뚜기 카레가루를 구입했다.

식당에서 나오는 일본식 카레도 좋지만 역시 나는 한국 스타일로 커다란 냄비에 한가득 끓여 낸 오뚜기 카레가 제일 맛있다.

아끼는 스타우브 무쇠냄비를 잘 달궈 올리브유를 두르고 깍둑썰기한 감자부터 후추 조금 뿌려 투하했다.

감자가 어느 정도 익었을 즈음 가늘게 썬 양파와 두툼하게 자른 스팸 한 통을 넣고 볶다가 물을 붓고 버섯을 추가한 뒤 재료가 익을 때까지 팔팔 끓인다.

약불로 세기를 조절하면서 카레가루 한 봉지를 몽땅 넣고 뭉근하게 끓이면 드디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뚜기 스팸 카레 완성!

최애 궁합인 참치김치찌개까지 국물 자작하게 끓여 일주일 내내 삼시 세끼 카레라이스를 먹었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이 감칠맛이라니, 정말이지 2년은 너무 길었다.




내가 2년간 그 좋아하던 카레를 멀리 했던 이유는 치아 교정이다.

교정 중에 가려야 하는 음식이 생각보다 많지 않지만 유독 카레만은 절대 입에 대서는 안되는 금기다.

교정기를 끼고 카레를 먹으면 치아에 붙은 교정 장치가 온통 강황으로 노랗게 물들 것이라는 공포에 가까운 의사 선생님의 경고 때문에 나는 강제로 카레 금식에 돌입해야 했다.

스스로 인내심이 강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웃을 때마다 노란 교정기를 보이느니 차라리 카레를 포기하고야 말았던 과거의 자신에게 경의를 표한다.

억겁과도 같은 인고의 세월이 지나고 교정 장치에서 해방되던 날, 내 머릿 속엔 온통 카레 뿐이었다.


35년 넘게 생긴대로 살아와 놓고 느즈막한 나이에 갑작스레 치아 교정을 하기로 한 건 순전히 충동에서였다.

제대로 치과를 알아 보지도 않고 인터넷 검색 한 번으로 회사 근처의 교정 전문 치과에 덜컥 예약을 하고 상담 후 바로 치료비의 반액을 선납하고 발치 일정을 잡았다.

삼십대 중반에 최소 2년 이상을 교정기를 낀 채 생활해야 한다는 사실도, 천만원이나 되는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는 사실도 깊게 생각하지 않은 충동적 결정이었다.

세상 가장 좋아하는 카레를 먹을 수 없다는 것도 그 때의 나를 멈출 만한 이유는 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나는 그 당시 내가 왜 그랬었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늘 여자로서의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다.

인간으로의 자신은 한없이 당당했고 자존감 역시 하늘을 찌를 만큼 높았지만 유독 여성으로서의 나는 항상 작고 보잘 것 없었다.

그래서일까 연애에 있어서도 감히 누군가를 먼저 좋아해 본 적 없이 그냥 나 좋다는 남자를 만나 사귀고 헤어지길 반복했다.

다행히도 스스로의 평가보다는 나은 여자였는지 꽤 괜찮은 남자들의 구애가 있었고 덕분에 끊김 없이 연애를 하다가 때가 되어 결혼했지만 여전히 나는 자신이 없었다.

겉으로는 꾸준히 사랑받으며 사는 세상 걱정거리 없는 여자였겠지만 실상 나는 애정에 목마른 소박데기였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어 남들이 보기에 안정적인 애정의 울타리 안에 있었지만 전남편과 살면서 여자로서의 내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그는 매번 나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었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비참함을 떠안겼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갈 수록 나는 여자로서의 자신을 감추거나 외면하기 급급했고 종국엔 자아에서 여성성을 지워 버림으로써 바닥난 자존심을 지켰다.

원체 리더십이 있는 편이긴 했지만 매사 더욱 나서서 대장부처럼 행동했고 여자의 삶이 싫다고, 다시 태어나면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사실 나는 예쁜 것들을 좋아하고 예쁜 옷을 입는 것도, 몸을 예쁘게 가꾸는 것도 좋아한다.

취미며 성향도 전부 소위 여성스러운 것들 투성인데도 불구하고 대외적으로 나는 늘 남자로 살았다.

그래야만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나를 정당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외모가 좀 나아지면, 예뻐지면 혹시 나도 사랑스러워질 수 있을까 싶어 치아 교정을 시작했다.

얼굴에 칼을 대는 성형수술은 무섭고 마침 하악 부근 치아가 어긋나 저작 기능에도 문제가 생겼겠다 치아 교정이 딱이었다.

그리고 2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이혼했고, 교정 치료가 끝났고, 아쉽게도 예뻐지지 않았다.




카레라이스 위크를 맞아 좋아하는 카레를 퍼먹으며 생각했다.

이럴 거면 나는 대체 교정을 왜 한걸까.

딱히 예뻐지지도 않았고 결혼 생활은 결국 종료했으며 여자로서의 자신감은 나의 외모 수준과 상관 없이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자연스레 되찾았는데 말이다.

애시당초 내가 예쁘지 않아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사랑할 줄 몰라서 잘못된 연애와 그릇된 선택을 반복했던 건데 왜 엉뚱한 데서 해답을 찾으려 애쓰며 2년 동안 카레도 못먹는 구차한 삶을 살았는지, 한심하고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앞으로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삶을 가득 채우며 살거다.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지,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는 더 이상 내게 행복의 지표가 되지 않는다.

내 눈엔 그 모진 일들을 겪고도 성실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 가는 내가 제일 예쁘고 기특하다.

좋아하는 카레가 먹고 싶으면 언제라도 카레라이스 위크를 열 거고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행복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가장 아껴 주며 남은 인생을 살아갈 생각이다.

하기 싫거나 두렵거나 내키지 않는 일은 안 할 거다.

좋아하는 일만 하기에도 애틋하고 아까운 게 내 인생인걸 이제야 깨달았으니까.

이전 06화 저스트 스테이크의 추억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