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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놂작가 Jul 26. 2022

저스트 스테이크의 추억

꼭 거기를 가야만 속이 시원했냐

자타공인 미식가이자 탐식가로서 나는 수입의 꽤나 많은 부분을 식비로 지출해 왔다.

특히 한 때는 파인 다이닝에 꽂혀 서울 시내의 웬만한 레스토랑은 모조리 발도장을 찍었고 자연히 연애를 할 때 애인에게 핫한 식당을 소개하는 것은 내 역할이었다.


식도락 방면에 문외한인 애인을 데리고 좋은 식당에 가면 하나같이 처음에는 압도적 인테리어나 복잡한 테이블 매너, 생소한 메뉴와 기가 막힌 가격을 부담스러워 하며 시종일관 어색함을 감추지 못한다.

예전에 만났던 사람들 중 파인 다이닝에 가장 익숙지 않았던 공대생은 애피타이저로 제공된 멜론 프로슈토의 멜론을 껍질째 먹어 치워 나를 경악하게 한 적도 있다.

대화를 나누다 무심코 쳐다 본 그의 접시가 아무 것도 없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곤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는지, 그리고 다음 코스를 위해 접시를 치우러 온 서버가 어찌나 의아한 표정을 짓던지 지금 생각해도 창피함에 등줄기가 오싹해 진다.


이다지도 무지했던 자들은 비교적 긴 연애 기간 내내 꽤 괜찮은 레스토랑들을 들락거리며 점차 익숙하게 정찬을 즐길 수 있게 되고 나중에는 기념일에 내가 좋아하는 식당에 미리 예약을 해 두는 센스까지 발휘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나는 적잖은 시간과 비용, 노력을 투자해야 했고.

이렇듯 원래 나는 조금 모자라지만 다듬으면 괜찮아질 남자를 골라 꽤 오랜 시간 함께 하면서 잘 가꾸어서 방생하는 것이 특기인데, 이 연애 방식의 문제점은 내가 소개한 수 많은 맛집을 EX들에게 빼앗긴다는 데 있다.




아주 어릴 적에는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대학생들 동선이 거기서 거기고, 그 당시엔 당연히 비싼 레스토랑에 다닐 여유도 없어 기껏해야 학교 주변 맛집에서 데이트를 하는 것이 다였으니 헤어진 뒤 각자의 연인과 함께 내가 소개해 준 식당에서 마주쳐도 기분이 상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회인이 되고 나서 만났던 이들이 내가 데려 갔던 식당에 자신의 현재 연인과 함께 가서 마치 본인이 평소 파인 다이닝을 즐기던 사람인 양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에는 이상하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메인 포크와 디저트 포크도 구분 못하던 사람 손에 버터 나이프 쥐어 줬더니 그걸로 자기네들 여자친구 빵에 스프레드 잘 발라 먹여 주는 느낌이랄까.

자신이 잘 아는 식당이 있다며 어른인 척 여유롭게 내가 알려 준 레스토랑으로 상대를 에스코트해 가서는 능숙한 듯 메뉴를 주문하며 우쭐댈 모습이 그려져 꽤나 아니꼬왔다.

그러다 나랑 마주칠 걱정 따윈 왜들 안 하는 건데?




지난 달 오랜만에 구글 캘린더로 일정을 정리하려고 보니 낯선 스케쥴들이 눈에 띄었다.

내가 적은 일정이 아닌데 의아해 하며 살펴보니 글쎄 전남편의 계정이 연동되어 내 캘린더에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어느 주말의 일정, 저스트 스테이크.

양만 많았지 입이 고급은 아니라 먹는 데 굳이 돈을 쓰지 않는 그의 성향을 고려할 때 이건 분명 데이트일 텐데 행여나 나랑 마주치면 어쩌려고?

계정 공유를 해지하지 않아 본인의 일정을 내게 노출하는 무신경함은 차치하고 아니 어떻게 내가 자기 생일에 데려갔던 내 단골 맛집에 갈 생각을 했는지 기가 막혀 실소가 나왔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제 나는 받아들여야 했다.

공통점이라고는 서로를 좋아했던 마음 뿐이었던 우리가 마음이 다하자 헤어져 완전한 남이 되었다는 사실.

먼저 마음이 끝난 것도, 혼자만 인내해야 했던 관계를 회복하는 대신 혼자라도 행복해질 이별을 택한 것도 나였다는 사실.

연애 포함 약 7년의 시간 동안 내가 먹이고 입혀 사람 구실을 하게 만든 남자가 이제 애피타이저 접시 위에 멜론 껍질을 남길 수 있을 만큼은 성장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그가 다른 사람을 만나 다시 연애하고 사랑하고 심지어 결혼을 한대도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과거 어느 시점에 분명 나는 저스트 스테이크에서 그와 마주앉아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지만 그 때의 내가 온전히 충족됐었는지 묻는다면 답은 no다.

나는 항상 상대를 리드해야 했고 그것이 비단 맛집 예약 뿐 아니라 생활과 사상 전반에 걸쳐 주어진 역할이었다는 사실이 나를 지치고 힘들게 했다.

나 역시 때로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다.

매사 대장부처럼 나서서 진두지휘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한번쯤은 상대가 나를 위해 준비해준 상황에 몸을 맡기고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싶었고 모든 것을 가르치고 타이르는 대신 나도 그에게 배우고 싶었다.

우리는 함께함으로써 서로를 망가뜨렸다.

나는 세상 풍파를 맨몸으로 혼자 맞으며 포악하고 외로운 맹수가 되어갔고, 그는 느긋하게 내 보살핌을 받으며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천치가 되었다.




어느 일요일 오후, 저스트 스테이크에서 나름의 행복한 런치를 즐겼을 그를 생각하니 되려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부디 그가 이제는 자신이 앞에 나서서 이끌어 줄 수 있는 건강한 관계를 맺고 있길 바라고 그러기 위해서라면 내가 알려 준 이 세상 모든 맛집을 양보할 수도 있다.

나 역시 언젠가는 지치고 무너진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줄 나보다 큰 누군가를 만나 행복해질 수도 있을 테니까.

그 전에 캘린더 연동부터 해제하라고 알려줘야 할 텐데 연락을 해야 하나 이를 어쩐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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