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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놂작가 May 16. 2022

이제 오른손을 숨기지 않아요

유독 손에 대한 집착이 심한 편이다.

스스로의 손은 물론 남의 손 모양도 유심히 관찰하곤 한다.

남자든 여자든 손이 예쁘면 그 사람이 달리 보이는데, 그렇다고 원래 비호감이었던 사람이 예쁜 손을 가졌다고 해서 호감이 될 정도의 영향은 아니다.

그렇지만 확실히, 내가 좋아하는 모양의 손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유 모를 호감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남녀 불문하고 작은 손은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남성에게 이성적 호감을 느끼려면 그가 무조건 큰 손을 가져야만 하며, 손가락이 지나치게 가늘거나 소시지처럼 너무 퉁퉁해서도 안된다.

호빗마냥 손이 작고 통통한 남자와 사귀었던 적이 있는데 손을 잡을 때마다 그의 조그마한 손이 내 손가락을 채 감싸지 못하고 애처롭게 붙들고 있는 모양에 솔직히 정이 떨어졌었다.

반대로 손이 큰 남자와 만날 때는 크고 단단한 그의 손을 잡으면 묘하게 설레고 안정감이 느껴져 애교도 없고 스킨십도 서툰 내가 늘 먼저 나서서 깍지를 끼곤 했다.


손톱의 크기나 모양도 중요한데 바디가 크고 끝이 둥글기보다는 네모난 손톱을 선호한다.

반대로 여성의 경우 역시 바디는 크지만 끝이 둥글거나 라운드스퀘어의 모양을 가진 손톱이 더 예뻐 보인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길거나 지저분한 손톱을 보는 순간 100% 채워졌던 호감도가 급락한다.

남성은 흰 부분이 보이지 않게 깔끔히 바짝 깎은 손톱이, 그리고 여성은 무조건 네일샵에서 관리를 받은 가지런하고 세련된 손톱이 좋다.




이런 취향이니 스스로의 손을 가꾸는 데도 게으름이 없을 수 밖에.

어릴 적부터 늘 학교나 직장 근처에 단골 네일샵을 정해 놓고 회원권을 끊어 주기적으로 손이며 발을 관리하곤 했다.

나는 여자치곤 손이 크고 손가락은 매우 길고 가는 편이다.

반지 사이즈가 6호 반에서 7호 사이니 꽤 가느다란 손가락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매월 샵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손톱의 크기나 모양도 적당하다.

문제는 굵은 마디와 까만 피부, 그리고 나이를 먹을 수록 생겨나는 자글자글한 주름이다.


원체 손마디가 굵게 타고난 지라 집안일이나 손가락에 힘을 주어야 하는 일들을 최대한 피해 왔지만 오른손잡이에 글쟁이인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삼십 년 넘게 펜을 쥐고 살아온 결과는 처참했다.

비교적 매끈한 왼손에 비해 마디가 툭툭 불거지고 굴곡만큼이나 주름진 오른손은 참 못나고 초라해 보였다.

펜대 말고는 잡은 적 없는 손인데 누가 봐도 농사 일을 하는 사람의 손 같아 못마땅했다.


그래서 손을 내밀거나 누군가에게 보일 일이 있을 때 나는 습관적으로 오른손을 숨겼다.

손을 포갤 때에는 자연스레 왼손이 위로 가게 두었고 마음에 드는 네일아트가 완성되었을 때 인증샷의 피사체가 되는 쪽 역시 왼손이었다.

입을 가리고 웃을 때에도 반사적으로 왼손이 올라갔고 관리를 받을 때 역시 입버릇처럼 "제가 오른손이 좀 투박해요" 라고 굳이 쓸데없는 말을 매번 덧붙였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 버스 안에서 그 날도 허벅지 밑에 깔고 앉았던 오른손이 저려와 손을 빼서 무릎 위에 손가락을 쭉 편 채 올려 놓게 되었다.

오랜만에 물끄러미 오른손을 보다 보니 왠지 울컥 하며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대화가 통하지 않아 고독했던 마음을 일기장에 토해내듯 써내려간 손도, 그간의 몇 안되는 연애사에서 말로 다 하지 못하는 마음을 정성껏 적어 보낸 손도, 친구들을 초대해 서투른 솜씨로 칼을 쥐었던 손도 모두 이 못난이 오른손이었다.

숨기려 애쓰고 부끄러워 감추려고 했지만 사실 지난 날의 일상을 자연스레 지켜준 손은 열심히 사느라 알알이 마디가 굵어져 버린 내 오른손이었던 거다.




약 1년 사이에 끔찍한 일들을 연이어 겪으며 나는 어쩐지 좀 변해 버렸다.

어딜 가나 당당하던 내가 자꾸만 움츠러 들고 틈만 나면 어디론가 숨기 일쑤에 늘 혼자 있는 편을 택한다.

너무 큰 상처를 입어 망가지고 무너진 내 모습이 창피했고 아무리 노력해도 더 이상 전처럼 티없이 밝고 맑게 웃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치고 멍든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결국 그 모진 시련을 겪어 내고 견뎌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스스로를 기특해 하기로 했다.

다시는 이 모든 일을 당하기 전의 예쁘고 밝은 모습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오며 상처 투성이가 된 지금의 내가 나는 못내 애틋하다.

울퉁불퉁 못나게 내 마음에 남은 상흔은 지난 아픔을 버텨 낸 훈장이고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앞으로 나는 내 오른손에 더욱 화려한 파츠를 붙여주고 매일 밤 핸드크림도 듬뿍 발라줄 예정이다.

뒤로 손을 숨기는 대신 당당하게 마디 굵은 오른손을 여기 저기 내밀 것이다.

그래서 자꾸만 마음이 무너질 때마다 혼자만의 동굴에 숨는 대신 상처 투성이 못난 내 영혼을 보듬고 달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갈 생각이다.

잘 견뎠다고, 정말 고생 많았다고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지도 모른다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토닥여 주겠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그 누구의 위로도 아닌 스스로의 인정과 칭찬이니까.

언젠가는 나도 이 지리한 해저 터널에서 완전히 빠져 나가 다시 빛 속으로, 걸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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