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극점의 대화(1)

by 라스파거스

"나... 집 좀 가게 만원만 줘"


어쩐지 흐리다더니. 유튜브에서 우산을 챙기라고 했던 방송이 생각난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다.


"만원만... 응?"


그의 앞에 서있는 갓을 쓰고 있는 남자는 눈을 바라보며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다시 한번 만원을 요구했다. 갓과 어울리지 않는 은색 반짝이는 시계가 이질감이 든다. 뭐 근처가 평화시장이니깐 거기서 누군가 건넨 만원으로 샀겠지라는 생각이 하며 말했다.


"돈을 드릴 수는 없어요. 다음 고객님들 기다리니깐 좀 앉아서 쉬다가 나가세요"


그리곤 옆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현관문 옆 로비 매니저님을 바로며 두 눈을 까닥까닥 시계 추처럼 움직였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이런 시그널로 모든 게 통했지만 새로 오신 매니저님과 호흡이 잘 맞지 않는다. 하긴 이런 고객이 오면 나한테까지 직접 오는 일 없이 장판파 장비 같은 전 매니저님에게 막혔어야 했는데, 지금 그의 앞에 있으니 말은 다했지 뭐.


"만원만 그러면 갈게"


다시 한번 만원을 요구하며 그의 얼굴과 가깝게 다가선다. 코로나 이후 생겨버린 플라스틱벽이 그의 악취를 막아주긴 하나 역 부족이다. 술 냄새와 담배 냄새. 술과 담배까지 다 하면서 만원이 없다니. 지금 말하는 그의 집의 옆 건물 편의점이 분명하다.


"안 돼요"라고 말을 건네는 순간. 웃으며 알랑방귀를 끼던


남자가 돌변했다.


"지점장 나와! 지점장 나오라고 해"


순간 객장의 소음이 차단되고 그만의 독주가 이어졌다. 이때쯤이면 책임자가 나서서 막아주길 바랐지만, 갑자기 모두 침묵 속의 전화가 이어졌다. 옆 자리 이 과장님을 슬쩍 봤다. 앞에 고객은 없지만 전화를 열심히 거는 척을 하며 규정집을 켜기 시작한다.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면 더 눈에 띄기 마련인데, 다행히 그것을 눈치채는 사람이 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우 같은 사람.


"지점장님 지금 외근 나가서 안 계세요. 더 이상 이러면 업무방해로 경찰 불러야 하니깐 나가세요"

"그러니깐 만원만 달라고. 너 지금 내 이자로 먹고사는 거잖아. 돈도 많이 번다며. 그깟 만원이 아깝냐 아까워? 내가 여기 은행 얼마나 충성 고객인 줄 알아? 너 대출 창구잖아 대출창구. 아 그럼 이렇게 하자. 나 만원만 대출해 줘. 내가 내일이면 갚을게 내일 금방 간다. 벌써 지금이 몇 시야 3시 50분이잖아. 내일 내가 9시에 문 열면 바로 집에서 만원 가지고 온다고"


술 냄새와 담배 냄새 그리고 흥분해서 시시각각으로 보이는 그의 침방울이 플라스틱 벽에 가득하다. 이 벽까지 없다면 나의 존엄성과 비위 모두 상해 버릴 텐데, 어쩔 땐 코로나가 고맙다.


"안 돼요. 저희는 금전대차가 불가능하고, 만원 대출은 안 해드려요"

"규정 가지고 와 , 규정 가지고 오라고 만원이 대출이 안된다는 규정을 가지고 오라고!"


서있는 게 힘들었는지 어느새 앉아서 책상을 두드린다.


"그럼 신분증 주세요"

"너 나 몰라? 내가 여기 30년 거래했는데 나 몰라? 너 언제 여기 왔어 인마?"


4년째다. 4년째 여기 앉아있었는데 갑자기 온 너는 누구냐.라는 말을 간신히 참으며,


"신분증이 없으면 금융실명제에 의해 금융거래를 도와드릴 수 없어요 그만 퇴점해 주십시오"

"거참 시발 더러워서 살겠냐, 그깟 만원 아껴서 뭐 하고 잘 먹고 잘살아라 이 새끼야"


때 마침 울리는 지점 영업시간 종료 벨에 맞춰서 나가는 그의 뒷모습. 악취는 그대로지만 조용해진 주변에 마음이 편해진다. 책상 전화기 옆에 놓인 탈취제를 꺼내 부정한 그의 냄새를 없애기 위한 X자 표시를 그리며 탈취채를 고객용 책상에 분사한다.


"계장님"


옆 자리 이 과장이 불렀다. 고생했다고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들려던 순간.


"오늘 좀 빨리 나가야 해서 자동화 마감 좀 대신해줄 수 있어?"어디 좀 들려야 해서"


너 캐리어 들고 출근한 거 알고 있어. 제주도 간다며.라는 말이 치솟아 오르지만 사회생활이니깐. 자동화기기 마감 얼마 안 걸리니깐. 이런 자기 위로를 하며 말했다.


"네"


지점에 설치된 4대 중 2대의 자동화기기가 오늘의 시재가 맞는지 확인하는 동안 잠깐의 침묵이 돌아왔다. 글이나 다시 써볼까?


아직 버리지 못한 그 꿈은 침묵이 돌아오는 순간에 같이 그에게 다가왔다. 중학교 시절 잠깐의 낮잠을 자며 꿨던 꿈이 너무 재밌었던 탓에 글로 옮기며 터무니없이 타게 된 학교 '청소년문학상'. 그 경험은 그가 작가 될 운명이라 생각하게 했다. 이후 꿈을 꿀 때마다 적어놓기 위해 침대 머리맡에 블루투스 키보를 올리고 잠에 들었고 자다 일어나 키보드를 두드리는 일이 많아졌지만 요즘은 거의 꿈을 꾸지 못한다. 일어나고 일어날 뿐. 그에게 꿈이란 정말 이상향이 되어버렸다.


하루 종일 누군가 나를 부리고 나 또한 누군가를 부르는 은행에서 그에게 꿈이란 그 꿈을 생각하게 하는 침묵이란 흔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을 즐기려던 찰나, 자동화기기가 흔들렸다. 마감 중인 자동화기기의 전면 카메라를 보니 카드를 투입하는 쪽에서 어떤 여자가 소리치며 기계를 흔드는 게 보였다. 뒤편에서 그가 말했다.

"왜 그러세요"

"아니 카드가 빠졌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놈의 은행은 나에게 그 갸녀린 침묵의 시간도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다. 마감을 마치고 자리에 돌아오니 옆 자리 이 과장은 향수 냄새만 남기고 떠나 있었다. 꼭 누구랑 똑같이 없어지네.라는 생각을 하며 마감을 시작했다.


처음 은행에 입사한 이유는 워라밸 때문이다. 4시면 문 닫고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지극히 고객입장의 생각에서 본 사실은 현실과 맞지 않았다. 4시 이후에 퇴근해서 글을 써보겠다는 바보 같은 다짐은 출근 첫날 바로 깨졌다. 돈 주고 돈 받고 은행업무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수신 창구에 앉은 나는 첫날부터 마감시재가 만원이 비면서 은행시작의 악재가 이어졌고 (물론 그의 실수이긴 하다) 익숙해질 무렵 시작된 코로나로 소상공인 대출 부 담당이었던 그의 퇴근시간은 8시가 항상 넘었다. 8시가 익숙해지니 꿈이 멀어졌다. 매일 퇴근하고 눕고 자고 출근하고의 반복. 은행이면 재밌는 사람들 많이 만날 수 있고 좋겠다라고 말하는 친구들의 말이 가끔 생각났지만 그 얘기를 나눌 기회가 확연히 적어진 나에게는 그저 일이었다.


퇴근하며 갓을 쓴 남자 얘기를 해줄까 하며 핸드폰을 꺼냈다. 엄마, 그리고 아빠 순서로 전화를 걸었지만 둘 다 받지 않는다. 언덕에 있는 자취방에 도착해서 그럼 글로 남겨볼까 하면 노트북을 꺼냈다. 깜빡이는 커서 속 나는 글자를 쳤다.

'갓 쓴 남자가 오늘 왔다. 만원을 달라고 했다. 주지 않았다.'

키보드의 자금 와 모음을 이리저리 조합했지만 결국 남는 것은 이 3 문장뿐이었다. 내 글은 재미없다. 작가가 되지 못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나의 글은 재미없다. 나는 재미없다. 오빠는 재미없다. 맨 마지막 그녀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노트북을 닫았다.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16화에스디멘디아(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