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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준원 Aug 17. 2020

복수심은 눈을 멀게 한다

한국 사회의 특이한 병이 DSM-5에 등재되어 있다. 다름 아닌 화병이다. 과연 이러한 화병은 어떠한 형태로 나타날까. 자신과 백년가약을 맺기로 약속하고 함께할 행복한 순간을 꿈꾸는 사람에게 날벼락 같은 애인의 죽음 소식에도 우리는 화를 참고 성인군자 행세를 하는 태도가 과연 올바른 일이고 가능한 일일까.


고대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는 <화에 대하여>에서 네로 황제의 화로 다스리지 못하는 태도를 지켜보며 그의 파멸이 어떤 결과를 나타내는지 깊은 통찰을 얻는다. 비록 오래전에 쓰인 고전이지만, 근본적인 화는 문화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발생하지 않은 듯싶다. 그저 억제되는 문화가 깊게 퍼져 있지만, 사회 곳곳에 화를 겉으로 분출하면서 죄책감과 결과에 따른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비이성적 인간이 나타난다.


<화여 대하여>는 세네카의 동생이 화를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는지, 질의에 응답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1, 2부에서는 화의 근본 원인에 대한 고찰과 어떤 영향이 나타나는지 세네카의 철학이 담겨 있다 3부에서는 화를 다스리는 법에 대해 언급한다. 책을 읽는 내내 화를 다스리지 못하여 파국에 치달는 형화와 조선의 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악마를 보았다>와 조선의 왕으로 인정받지 못한 연산군이다. 영화의 두 주인공 최민식(장경철 역)과 이병헌(수현 역)은 범죄자와 경호원이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지만, 결혼을 앞둔 애인의 죽음 소식에 애인이 겪은 아픔의 수천 배 만큼 갚아 주겠노라 다짐한다.



화는 과연 필요한 것인가


인간은 타인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시키고, 화는 상대방을 끌고 들어갈 수만 있다면 기꺼이 자신마저도 위험에 빠뜨린다. <화에 대하여> 40p


타인이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 화가 치솟아 엄한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연쇄살인마 장경철. 애인이 잔인하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에 더욱 큰 고통으로 복수하겠다고 다짐하는 수현. 화는 결국 앙갚음에 집중한다. 화는 스스로 마음을 파괴하는 감정이다. 화를 낸다고 자신의 감정이 깨끗하게 해소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화는 그렇지 못하다. 또 다른 죄책감과 누군가의 마음속에 복수의 씨앗을 남긴다. 오히려 화를 내는 행위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여 더욱 화의 감정을 무디게 만든다.


자신의 애인을 무참히 살해한 범인을 찾아 나서는 수현은 용의선상에 있는 여러 명을 추리고, 끝내 장경철을 만난다. 하지만 그의 화는 한 번의 앙갚음으로 도저히 해소되지 않아 단번에 똑같은 죽음으로 복수하지 않는다. 장경철을 기절시키고 억지로 GPS 장치를 삼키게 하여, 조금씩 고통을 선사한다. 수현의 본성은 앙갚음을 추구하지 않았지만 하나의 충격적 사건으로 극도의 화가 생성되었다.



선한 사람이 앙갚음에서 기쁨을 얻지 못한다면, 앙갚음으로 쾌감을 느끼고자 하는 열정에서도 전혀 기쁨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화는 자연에 반하는 것이다. <화에 대하여> 43p


세네카가 생각한 화라는 감정을 소중한 사람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해도 차단할 수 있을까. 해로운 요인을 받아들인 다음에 관리하는 일보다 애초에 차단하는 환경설정이 보다 중요하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통제 불가능한 수현의 사례가 없는 건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이성이 노여움과 격정으로 오염되어 행동을 통제하지 못한다.


장경철은 아픈 몸을 이끌고 어디론가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가는 곳마다 사고 치는 순간에 수현은 행동을 저지하고 장경철에게 정의의 심판처럼 통쾌한 복수의 칼날을 겨눈다. 이에 자신을 뒤쫓는 수현에게 장경철의 광기는 극에 달한다. 화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면 이성의 영역은 비활성화 상태로 바뀐다. 감정선이 폭발하면 이성의 뇌와 연결이 끊어지고 감정의 의도대로 행동은 이어진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규칙, 윤리, 도덕은 이성의 영역이 활발해야 판단할 수 있다. 그렇지만 법의 테두리에서 행해지는 판결은 수현이 원하는 고통을 장경철에게 하사하지 못하고 단지 사회와 격리되는 조치로 마무리된다. 법의 정신은 화가 아니라 흔들림 없는 단호함이다. 판사는 사람의 죄에 판결을 내릴 뿐 그를 증오하여 화를 내지 않는다. 수현은 이러한 처사에 자신이 직접 심판관이 되길 자처했다.



화는 마음의 동의하에 일어난다


이것은 화가 아니라 야수성이다. 야수성은 자신이 위해를 당할 만큼 갚아주기 위해 상대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상대에게 해를 입힐 수만 있다면 심지어 자기도 위해를 당할 각오가 되어 있다. 이들은 복수가 아닌 쾌락을 위해 채찍질을 하고 남의 살을 찢는다. <화에 대하여> 91p


자신에게 GPS 장치를 억지로 먹인 사실을 눈치챈 장경철은 지사제를 입에 털어 넣고 자신의 분뇨에서 장치를 찾아내기에 이른다. 지금까지 자신이 당한 수모를 복수하려고 이동하지만, 수현은 장경철의 행방을 알지 못해 당황한다. 더 끔찍한 앙갚음을 할 거라는 장경철의 친구 태주의 말에 경찰인 오 과장에게 황급히 전화한다. 하지만 수현의 장인과 처제는 장경철에게 피해를 입고 만다.


장경철은 수현에게 치명타를 입히고 경찰에 자수하려 한다. 자신에게 더 이상 신체적인 복수를 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렇지만 수현은 장경철을 다시 납치하여 장경철의 집으로 끌고 간다. 최후의 앙갚음은 무엇일까. 부모가 자식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수현은 전혀 죄책감이 없는 장경철에게 재갈을 물리고 문에 고리를 연결한다. 결국 장경철은 부모가 보는 앞에서 죽는다.


처절히 원수에게 고통을 안겨주며 앙갚음을 완성한 수현은 이어폰을 빼며 눈물을 흘린다. 그렇지만 그의 감정은 복잡 미묘하다. 카타르시스를 느껴 웃는 것도 복수에 성공하여 애인의 원한을 해결하여 슬퍼하는 표정도 아니다. 화의 결과는 똑같이 자신도 파괴되어가는 허무함을 보여준다. 화는 솔직함이라기보다 분별없음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결코 영리하다고 할 수 없는 악덕이다.


선의의 경우는 지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지만, 악의는 이기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복수는 비록 그것이 정의로운 일로 받아들여진다고는 할지라도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복수하는 사람은 애초에 잘못된 행동을 한 사람과 별다를 게 없다. 단지 누가 먼저 상대에게 고통을 주었느냐가 다를 뿐이다. <화에 대하여> 141p


수현의 독단적인 복수를 막으려는 오 과장은 이런 내막을 알기라도 한 듯 보였다. 정의의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고 수현을 설득하려고 시도하지만 수현은 결국 동일한 방법으로 복수를 진행한다. 통쾌히 복수에 성공했지만, 수현의 복잡한 감정에서 알 수 있듯이 복수의 쾌감과 또 다른 악이 생성되는 모습이 아닐까 한다. 흡사 무협지에서 아버지의 철천지원수를 처단하고 복수에 성공하면 또 다른 광기가 생성되어 복수로 이어진다. 다른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건 매한가지다.



화는 마음속 전쟁이다


화는 침착하지 못한 성격에게나 차분하고 편안한 성격에게나 똑같이 위험하다. <화에 대하여> 166p


장경철처럼 불같은 성격과 수현의 차분함에서 발생한 화는 모두 위험한 결과를 만들었다. <화에 대하여>에서는 이러한 화를 다스리려면 우선 자신의 능력을 파악하고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거나 지치게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인간은 화에 지배당하는 일이 상당히 많다. 목표를 세웠는데 도달하지 못하거나 자신에게 손해라고 판단하는 일에는 분노를 일으킨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을 고려한 목표는 달성할 확률이 높아 화에 지배당하기보다 기쁨과 성취감을 맛볼 수 있다. 시도하고 자주 실패하면 삶은 무기력하고 공허해져 더욱 우울감에 시달린다. 그래서 자기 인식이 대단히 중요한 항목이다.


화에 대한 최고의 치유책은 유예다. <화에 대하여> 183p


분노의 감정이 자신을 휘감는다면 그 감정 자체와 신체에 주목해보자. 현재 자신의 상태가 떨림, 답답함과 같은 감정으로 점철되어 있다면 나의 마음이 왜 그런지 잠시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자. 이처럼 자기 객관화로 화를 유예시킴으로써 적절한 판단으로 돌아서는 기회가 생길 것이다. 물론 말처럼 쉽지 않다. 손해를 입힌 누군가를 원망하고 복수의 칼날을 겨누고 싶지만 오히려 자신에게 독이 됨을 상기해보면 어떨까.



참고 도서 : <화에 대하여>, 저자 :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출판 : 사이

참고 영화 : <악마를 보았다>

#화에대하여 #심리테라피 #세네카 #스토아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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