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이자 언론인인 다니엘 골먼은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을 '편도체 하이재킹'이라고 표현합니다. 뇌 안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편도체는 위협, 공포, 분노 같은 감정을 재빨리 감지하는 경보 장치라 생각하면 됩니다. 이와 반대로 전두엽(이마 앞 쪽 뇌)은 상황을 판단하고, 장기적인 결과를 계산하고 행동을 조절하는 컨트롤 센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먼저 편도체가 경보를 울리고,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그 자리에 얼어붙는 투쟁-도피 반응이 나타납니다. 편도체가 활성화가 된 상태에서 뇌는 에너지를 모두 투쟁-도피에 적극적으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전두엽의 이성적 판단은 잠시 비활성화 상태로 전환됩니다.
감정이 올라온 상태에서 이성을 잃고, 나중에 후회할 말을 거침없이 내뱉고, 문을 쾅 닫는 행동을 하고 난 뒤에 편도체가 다시 안정화 상태가 되면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라며 뒤늦게 후회하곤 합니다.
즉, 감정이 생존 모드로 변경되어 강력한 투사가 되어버린 것이죠.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약간의 시간을 할애하여 멈춤이 필요합니다. 신체를 진정시키고 감정과 생각을 분리해 보려는 의식적 노력에 필요한 것이 바로 나만의 심리적 닻입니다.
'그 한마디'로 모든 게 무너졌던 날
예전 회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외주로 제작한 프로그램을 실제 테스트 하려던 날이었습니다.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하루 종일 테스트가 진행되었고, 부서 전체가 예민해져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날도 늦은 시각까지 야근을 하고 기숙사로 가는 길에 아무도 말이 없이 침묵뿐이었습니다.
오랜 침묵을 깨고 제가 한 마디를 팀장님에게 건넸습니다. 오늘 체크리스트 중에서 그래도 80% 이상은 끝냈으니 성공적으로 마친 것 아니냐고 나름 긍정적인 말투였죠. 팀장님은 "아니. 전부 다 끝냈어야 했는데. 왜 이렇게 밖에 못해?"라며 굉장히 차갑고 날카로운 말투였습니다.
순간 뒤통수를 누가 세게 친 것처럼 멍해졌습니다. '이렇게 밖에?'라는 말은 그동안 제가 쏟아부었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오랜 시간 공들여 개발한 내용을 검증하려고 오랜 해외 출장 기간에도 불구하고 계속 버텼는데 공든 탑이 무너진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제 안에서 동시에 튀어나온 충동이 있었습니다. '그럼 인력이 더 붙여주던가요. 제가 개발하고 테스트하고 보고서까지 다 써야 하는 마당에 이건 너무 하지 않나요?'라는 억울함이었죠.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들이 입술 끝까지 올라와 있었습니다.
지금에서 그 장면을 회상하면 그때가 정확히 편도체가 전두엽을 덮어버린 순간, 골먼이 말한 편도체 하이재킹이 일어날 때였던 것 같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당시 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문채 홀로 기숙사까지 걸어가며 여러 생각에 잠겼습니다. 사실 말이 나오지 않을 만큼 얼어붙었거든요.
혼자서 기숙사까지 걸어가는 동안 머릿속에서 '나는 왜 이런 취급을 받지?', '여기서 더 버티는 게 맞나?'라는 생각만 맴돌았습니다. 기숙사에 도착해서 아무런 말도 없이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습니다. 사실 잠이 오지 않았지만 억지로 불을 끄고 누웠습니다. 회사에서 쌓아온 시간들이 한순간에 의미를 잃어버린 기분이었습니다.
사실 책에서 아무리 감정 조절 이론을 많이 읽고 지난날을 회상하며 글을 써도, 실제 유사한 상황에 처하면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경함을 자주 하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심리학 도서를 읽지도 않아서 더욱 무엇 때문에 힘든지 알지도 못했지요.
감정 조절이 제일 어려운 순간은 감정이 터지기 직전이 아니라, 이미 터져버린 그 순간입니다. 감정 조절과 관련된 책을 읽어보면 늘 말하는 루틴이 있습니다. 감정이 올라오면 '심호흡을 6번 정도 해보세요', '3초 정도 멈추고 행동하세요', '감정과 거리를 둬야 합니다'라는 한 박자 쉼을 뜻하는 말들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미 불이 붙어 버린 상태에서 소화기를 찾는 느낌입니다. 부정적 감정 자체가 생기지 않는 게 가장 베스트지만, 어쩔 수 없이 부정적인 감정이 활성화되면 '멈추기' 단계를 실행하는 것이 차선책입니다. 앞서 여러 책에서 언급한 한 박자 쉼을 어떻게 하면 실행할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다시 찾아온 위기,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심리학 공부를 한창 하던 중 식탁에 신기한 종이가 하나 놓여있었습니다. 아내는 아이에게 자주 화를 내는 자신의 감정 조절의 대처법으로 심리적 닻을 하나 마련했습니다. A4 용지에 큰 글씨로 "왜 그랬을까?"라를 적어놓고 아이에게 화가 치밀어 오르는 순간에 그 문구를 보며 생각을 해보면 감정이 조금은 사그라든다고 하더군요.
아내가 사용한 방법을 저도 사용해서 책상 위에 커다랗게 "그럴 수 있지"라는 문구를 하나 마련해 놓았습니다. 여러 사람과 협업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생각이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갈 때 갈등은 자연스럽게 펼쳐집니다.
그럴 때 몸이 지쳐 있고, 머리도 복잡하면 욱 하는 성질이 나타나곤 합니다. "아니.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예요?"라는 날카로운 말을 내뱉기 전에 '그럴 수 있지'라는 문구를 보면 일단 멈추고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말하지 않고, 고개를 잠깐 숙이고 눈을 감은 채 마음속으로 천천히 '그럴 수 있지. 왜 그랬을까'라고 되뇌어봅니다.
이런 심리적 닻을 활용하면 '지금 이 감정은 나를 통제하려고 한다'를 조금은 억제할 수 있으며, 상대방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깊게 이해하는 배려심을 키울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성인군자가 아니므로 타인의 무례함과 다름은 올바로 구분하고 적절한 대처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화가 폭발 직전인 상태에서 그대로 말해버리면 비난의 목소리가 더 활성화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말을 한 번 꾹 삼키고, '그럴 수 있어'라는 글을 보며 잠시 그 자리를 피하면 조금은 편도체가 가라앉을 수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 심호흡으로 이완시키면 차분한 부정적 감정은 약간 사그라들 것입니다.
4초 동안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5~7초 정도 멈추고, 8초 동안 천천히 입으로 내쉬기를 여러 번 반복해 보세요. 숨을 고르는 동안, 감정의 불길이 아주 조금은 낮아짐을 느낄 겁니다.
'그럴 수 있지'라는 생각과 심호흡을 마치고, 머릿속에서 조금씩 문장이 정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구현 한 이유가 있을까요?", "제가 여기 부분은 이해가 되지 않은데, 어떻게 처리하면 될까요?"라며 자연스럽게 소통의 언어로 다가갔습니다.
"일을 왜 그렇게 해요?"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면 그 이후에 '나를 무시하는 건가?'라는 더 깊은 왜곡으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이런 사람과 같이 일하기 힘들다는 결론으로 쐐기를 박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날은 조금 다른 질문을 해보려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도를 내 마음대로 해석하지 않고, 내가 가진 인지 오류일 수도 있어서 어떤 착오를 보였는지 알아채려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하나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알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서 개발해서 인정받고 싶었고, 존중받고 싶었고, 최소한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는 듣고 싶었습니다. 욕구가 무엇인지 알게 되면 이건 말싸움으로 풀 문제가 아니라 표현으로 풀어야 할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중하게 개발 방향성을 논의하고자 다시 동료에게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물론 완벽한 I-Message도 아니었고, 교과서적인 대화 기술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상대방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했고,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현실을 고려한 대화였습니다. 감정 폭발 대신 상대방을 존중하고 의도를 물어서 함께 문제를 해결 싶은 욕구를 조심스럽게 꺼낸 본 셈입니다.
동료와 대화를 나누면서 의도한 내용을 적절하게 파악했고, 그 동료도 자신이 개발한 내용에서 발생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알려줘서 고맙다며 음료수를 한잔 건넸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잠깐의 멈춤과 몇 번의 호흡과 정중한 표현이 직장 내의 공기를 조금은 쾌적하게 바꿀 수 있다는 걸요.
나만의 Anchor 문장 만들기
위기 상황에서 감정의 파도가 나를 집어삼키려고 할 때, 한 박자 쉼이 되어줄 짧은 문장, 짧은 루틴, 짧은 이미지 하나를 만들어보면 제법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여러 심리학 서적에서도 자신만의 심리적 닻을 만들어보라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저의 아내는 "왜 그랬을까?"라는 문장이 심리적 닻이었고, 저는 "그럴 수 있지"라는 제 나름의 심리적 닻을 만들어서 활용했습니다. 검색을 해보면 여러 사람이 만들어 놓은 자신만의 심리적 닻을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이 순간도 지나간다'
'지금은 일단 숨부터 쉬자'
'이 감정은 내가 아니다. 나는 이 감정을 지켜보는 사람이다'
'나는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한다'
위기 상황에서 이와 같은 자신만의 문장을 보이는 곳에 놓고 잠깐이라도 문구를 확인한다면 의지력으로 되지 않던 감정의 속도가 조금씩 늦춰지는 걸 느끼게 될 겁니다. 물론 매번 성공하는 건 당연히 아닙니다.
어떤 날은 심리적 닻의 문장을 보고도 말이 먼저 튀어나오고, 다른 바쁜 일에 집중하다가 톡을 보면 순간적으로 욱하며 메시지를 전송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예전과 달라진 점이 하나 있습니다. 감정이 폭발한 뒤 스스로에게 '다음에는 심리적 닻을 확인하고, 한 박자 쉼을 다시 가져보자'라고 말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감정 조절은 결국 기술이라는 말을 이해하게 됩니다. 한 번에 되지 않습니다. 실수와 연습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근육이 붙는 기술이니까요.
감정 조절 훈련의 시간이 길든 짧든, 그 행동 자체만으로도 이미 감정의 파도 속에서 나를 지키려는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완벽하게 파도를 제어하지 못해도, 잠깐이라도 숨을 한 번 고르게 되면 다음번 파도 앞에서 조금 덜 휩쓸릴 확률이 올라갑니다.
폭발하기 직전 잠깐의 시간을 벌어주는 나만의 Anchor(닻) 문장은 위기 상황이 단순히 최악의 날로 남지 않고, 감정 조절 연습의 도구가 됩니다. 오늘도 각자만의 위기 한가운데서 마음속 어딘가에 심리적 닻을 하나씩 내려놓고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애쓰고 있을 겁니다.
감정의 파도는 앞으로도 계속 우리 곁으로 다가올 겁니다. 하지만 그 파도 한가운데서 흔들리고 있지만, 완전히 떠밀려가지 않을 심리적 닻이 파도를 조금씩 배우는 하나의 버팀목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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