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다르다고 적은 아닙니다. 관계의 이분법 깨기

by 곽준원

미국의 심리학자 마셜 로젠버그는 소속감에서 얻는 결속의 의미를 자신과 타인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일을 하는 행위라고 정의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진실은 무조건 옳다는 잘못된 생각을 품고 있죠. 이러한 생각은 일종의 나르시시즘으로 소통과 해결을 방해하며,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폭발하는 미성숙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다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는 이유는 사회의 금기를 깨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욱하는 그 순간 나도 모르는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말하되 사회적 필터를 장착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며 말하는 태도가 바로 진실함이 가진 함의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미러링의 태도는 저자세를 취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상황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려고 현명하게 처시하는 행동입니다.


대인관계 능력을 키우려면 우선 자신의 요구와 기대가 충족되지 않았을지라도 한탄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타인의 여러 특징들이 아무리 짜증 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건설적인 자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말처럼 쉽지 않지만 나아지려면 최소한의 노력은 필요하죠.


우리 관계는 여기까지인가 보다고 결론 내린 날

학창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꽤 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서로의 가족 이야기부터 회사에서 있었던 별것 아닌 소동까지 카톡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주고받던 사이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느 해 겨울, 제가 꽤 흔들리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회사 일도 꼬이고, 집안 일도 겹치고, 평소보다 더 자주 그 친구에게 하소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힘들다는 표현을 굉장히 자주 했었죠. 그 친구는 아주 잘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읽고 답변하지 않는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답장이 와도 '에고. 힘들겠다. ㅠㅠ 나도 요즘 정신없어서. 나중에 얘기하자'라는 식이었습니다.


사실 '나중에'는 오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가부터 저는 점점 더 긴 메시지를 보내고, 그 친구는 점점 더 짧게 답하는 구조가 되었습니다. 결정적인 장면은 회사에서 정말 힘들었던 어느 퇴근길이었습니다. 속으로는 그 친구에게 털어놓고 싶은 마음으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혹시. 요즘 내가 하는 이야기가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면 말해줘도 괜찮아. 그냥 나 요즘 이런 상태라고 알아주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었으면 했어."


그날 하루 저녁부터 다음 날까지도 답장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머릿속에서 떠올랐던 생각은 '우리 관계는 여기까지인가 보다'였습니다. 그 친구의 침묵을 저는 짐이 되고 있구나라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속으로 선을 그었습니다.


상처가 난 자리. 항상 말하지 않은 기대가 숨어있었다

갈등은 대부분 내가 기대한 방식과 다른 결과로 나타나서 발생합니다. 그래서 그 친구와 나눴던 대화 방식을 오랜만에 천천히 꺼내 보았습니다. 노트 한 장을 펴고, 내가 느낌 감정과 그 감정에 숨어 있었던 기대는 무엇인지 찾아보고, 실제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 적어봤습니다.


제가 느낌 감정은 서운함, 상실감, 배신감 비슷한 감정이 동반되었습니다. 그 감정 뒤의 기대는 힘들다고 말했을 때, 이 친구만큼은 끝까지 내 얘기를 들어줄 거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실제로 한 행동은 긴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변이 오지 않았거나 '나중에 얘기하자'라며 넘어가는 일이 반복되었죠.


이렇게 노트에 3가지를 나눠서 적고 보니까 제가 상처받은 지점은 단순히 답장이 안 왔다가 아니었습니다.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내 편이 없어진 듯한 말하지 않은 기대가 깨진 자리였습니다. 어쩌면 그 친구는 자신의 삶도 버거워 제가 보내는 무거운 메시지를 감당할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저는 그 여유 없음까지도 모두 '내 존재의 거절'로 해석해 버렸던 겁니다. 사실 안전감을 느끼는 관계는 서로의 고충을 부담 없이 이야기하는 사이가 아닙니다. 자신의 경계선을 상대방도 잘 알고 그 선을 넘지 않는 바운더리가 잘 형성된 관계가 오래갈 수 있죠. 저는 미숙한 상태였고, 저의 감정을 친구에게 버리는 몹쓸 짓을 하고 있었던 걸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타인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이해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친구의 입장을 상상하기보다 먼저 '감정 이면의 나'를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도 직접 노트에 써봤습니다.


그 관계에서 느낀 감정 적고, 감정 어래 깔린 저의 욕구를 다시 찾아봤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다시 자세히 적어봤습니다. 저의 마음을 적어놓고 한참을 들여다봤습니다. 그 친구도 흔들리는 사람일 수 있는 데, 저는 친구에게 치료자가 되어달라고 매달리고 있었더라고요.


이러한 깨달음을 얻고 굉장히 미안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 친구가 왜 답을 못 했는지, 어떤 상황이라서 그랬는지 저는 한 번도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운 감정도 느껴졌습니다.


관계 온도계를 다시 측정해 보기

그 친구와의 관계는 온도로 측정하면 어느 정도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전에는 분명 80~90도쯤 되는 사이였습니다. 사소한 얘기도 다 나누고, 서로가 서로의 근황을 제일 먼저 아는 관계였죠. 하지만 혼자만의 생각으로 관계를 정리하려고 한 그 사건 이후로 관계 온도를 20도쯤으로 내려놓고 있었습니다.


연락도 하지 않고, SNS에서 소식만 어쩌다 훔쳐보고, 먼저 연락 오면 그때 생각해 보자라는 식이었죠. 겉으로는 완전히 끊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관계가 끝난 것처럼 방치해 두었습니다. 아직까지 양가감정이 남아 있는 상태인지 그 친구와의 관계를 0도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완전히 끝내고 싶지는 않으면서 그러자니 상처를 다시 받을까 봐 두려운 상태. 관계는 늘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지 않고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0도에서 50도 정도로만 올려보는 시도는 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여러 심리학 도서에서 말하는 관계 회복력을 높이는 실습 중에서 가장 어려워 보였던 건 단연코 회복적 대화였습니다. "그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궁금해", "다시 대화할 기회를 갖고 싶어"라는 문장을 읽는 순간 한숨이 먼저 나왔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말을 꺼내기도 어려웠고, 어떤 대화부터 해야 할지 망설여졌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오랜만에 그 친구의 SNS에 올라온 사진을 보다가 문득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추억을 허무하게 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정말 몇 번을 지웠다 썼다 하면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 사진 보니까 문득 생각나서 연락했어."


회복적 대화의 교과서 같은 문장은 아니었지만, 그날의 저에게는 최대한의 용기를 낸 문장이었습니다. 얼마 뒤, 친구에게 답장이 왔습니다.


"나 잘 지내고 있어. 요즘 일이랑 집안일이 한꺼번에 겹쳐서 누가 연락 와도 답변하기가 어려웠네. 언제 여유가 되면 밥 한번 먹자"


그 답장을 읽는 순간 마음속에서 안도감이 들면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사이의 온도는 당장 다시 80도로 올라가진 않겠지만, 최소한 0도가 아니라는 건 알겠더라고요.


그 이후로 저는 관계 회복의 필수 요소인 '사과'를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예전에는 상대가 먼저 진심으로 사과해야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와의 일을 겪으면서 '사과'가 과연 필수 요소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사과가 없이도 관계가 어느 정도는 회복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이해하고 앞으로 어떻게 자신을 지켜나갈지 선택하는 과정입니다. 그 친구가 완벽한 해명을 해준 것도 아니고, 힘들 때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드라마처럼 사과해 준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친구도 자기 삶이 벅찼었고, 서로의 생각의 온도 차이가 났던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저는 저의 감정과 기대를 정리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잘 끊는 것과 잘 이어가는 것

인간관계 회복력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생각하다 보면 늘 부딪히는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게 맞는지 아니면 손절하는 게 맞는지 말이죠. 회복력이라고 하니까 무조건 끝까지 붙잡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관계 회복력은 타인을 통제하는 기술이 아니라, 나를 지키면서 타인과 연결되는 방법입니다.


어떤 관계는 온도를 조금 낮춰야만 서로가 덜 상처받는 거리에서 지속될 수 있습니다. 마치 고슴도치가 보살피려고 서로에게 다가가면 상처를 주듯 적절한 거리가 필요합니다.


매번 만날 때마다 나를 깎아내리는 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80도가 아니라 20도 정도에서 가벼운 안부만 나누는 사이로 두는 것이 오히려 나를 지키는 선택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서로에게 여전히 의미가 있지만 한 번의 오해와 상처 때문에 움츠러들어 있는 관계라면 20도를 50도로 올릴 만큼의 용기를 내보는 것이 회복력일지도 모릅니다. 회복력은 무조건 붙잡는 힘이 아니라, 거리를 조절하는 유연함에 더 가깝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도 다시 한번 떠올려 봤습니다. 완전히 끊어지진 않았지만 예전 같지 않은 사이, 마음속으로만 '언젠가 풀리겠지'하고 미뤄 둔 사람들은 몇 명 떠오르더군요. 혹시 이러한 지인이 떠오른다면 안부의 인사 정도만이라도 먼저 건네 보는 건 어떨까요.




인간관계 회복력은 상처를 안 받는 기술이 아니라, 상처를 안고도 다시 연결될 수 있는 마음의 근육입니다. 그 근육은 아주 사소한 실천에서 자라나는 것 같습니다.


관계에서 빚어진 작은 갈등이라도 그 안에서 발생한 감정을 노트에 한 줄 적어보는 것, 관계 온도계를 머릿속에 떠올려 보며 지금은 몇 도쯤인지 체크해 보는 것, 언젠가 한 번은 "너 그때 왜 그랬어?"라는 말 대신 "그날 나는 이렇게 느꼈어"라고 말해 보려는 시도가 필요합니다.


완벽하게 잘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어색하게 말이 꼬이고, 상대의 반응이 기대만큼 따뜻하지 않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내 마음을 이해하려 했고, 관계를 조금이라도 더 건강한 방향으로 끌어보려 애쓴 사람이니까요. 단순히 생각이 다르다고 '적'이라고 이분법적인 생각으로 대하지 않고,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라면 관계회복력이라는 근육은 조금씩 자라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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