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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달 엿새 Oct 19. 2020

최종 면접에서 떨어져도 괜찮아

A late bloomer

1년 반이 넘는 기간 동안 최종 면접에서 여러 번 고배를 마셨지만 목표한 기관에서 최종 탈락한 충격은 꽤 컸다. 나는 온종일 낙방의 허탈함에 휩싸여 하루의 원동력을 잃었다. 하여, 인턴 출근도 취업준비 공부도 할 수 없었다. 채용 과정 중 가장 힘든 순간은 최종 관문에서 거절받는 상황이다. 아무리 괜찮은 척해보려 해도 막상 탈락 소식을 들으면 결과를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지금껏 노력이 한순간에 수포가 되는 것 같았다. 그 결과 하나로 내 세상이 무너진 느낌이었다.



망망대해에 표류한 상황이었다. 목적을 상실하니 어디로 향해야 할지,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며칠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것도 못한 채 며칠을 보내다가 가까스로 책상에 앉아 보았다. 문득 생각이 스쳤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만둘 수 없었다. 여기서 포기하면 나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훌훌 털고 일어나서 걸어가면 뭐라도 될 것 같았다. 최종 단계에서 떨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게 해 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Butterfly 


어리석은 세상은 너를 몰라. 누에 속에 감춰진 너를 못 봐.
나는 알아. 내겐 보여. 그토록 찬란한 너의 날개.

꺾여버린 꽃처럼 아플 때도 쓰러진 나무처럼 초라해도
너를 믿어 나를 믿어 우리는 서로를 믿고 있어.

- Butterfly by 러브홀릭스 中  


취준생 초반, 처음으로 최종 면접에서 탈락하고 창피함에 휩싸였을 때 우연히 알게 된 노래였다. 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귀에 들어오며 왠지 모를 위로를 해주는 것 같았다. 취준생으로 살면서 너무 힘든 날에는 이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대관절 이 막막한 어려움을 누군가에게 토로할 힘이 없었다. 그런데 이 노래만큼은 내 마음을 알아줬다. 세상이 날 몰라줘도 나만큼은 내가 얼마나 노력을 하는지 떠올리게 되었다. 내 자존감이 바닥날 때마다 이 노래를 무한 반복하며 나 자신을 일으켰다. 여전히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난다.



떨어져도 괜찮아


가족이 전해준 괜찮다는 한마디는 나를 일으켰다. 떨어져도 괜찮다고. 그 회사 최종 탈락이 인생 끝이 아니라고, 다시 도전하면 된다고. 최종 단계까지 간 것은 나의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라고. 결과를 떠나 채용 과정에서의 모든 경험이 훗날에는 큰 도움이 될 거라고. 그러니까 모두 괜찮다고.


탈락의 충격에 휩싸여 나의 가치를 부정하려던 찰나, 괜찮다는 한마디는 포근한 위로가 되었다. 나 역시 결과에만 몰두한 채 그간의 시간을 잊을 뻔했는데 그 위로는 내 노력이 빛을 발휘할 것이라는 희망이 되는 말이었다. 소중한 사람들이 전해준 위로, 그 덕분에 나는 최종 탈락의 씁쓸한 패배의식을 스스로 밀어 버렸다.



외면할 수 없는 문제


도전도 좋지만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다이어리를 살펴보니 올해가 한 달이 남지 않았다. 연말이 되면 청년인턴 계약이 끝날 예정이었고 이는 곧 소득이 끊긴다는 의미였다. 가고 싶던 기관에 재도전을 한다는 것은 1년을 더 투자해야 하는 일인데 가족에게 손을 벌릴 수 없는 상황이라 시간과 비용이 있을 리가 없었다.


전략을 수정했다. 남은 공공기관 채용에 최선을 다하되, 생활비가 바닥날 때까지 합격하지 못하면 고향으로 돌아가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로 플랜 B를 세웠다. 떨어지는 이유를 모르는 취업 준비보다 정답이 확실한 시험공부를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직 안 끝났다


다이어리 일정표에는 미리 적어놓은 공공기관 공채 일정이 눈에 띄었다. 아울러 그간 열심히 썼던 원서 덕에 다른 공공기관의 필기와 면접 일정도 간간이 잡혀 있었다. 아직 불씨가 남았다. 그간 준비했던 시험과 면접 준비를 토대로 다른 공공기관의 채용 일정에 박차를 가했다. 보통 주말에는 필기를 보고 평일에는 면접이 이어졌다. 어떤 날에는 두 건씩 예정되기도 했다. 비록 목표 기관에서 최종 탈락은 했어도 공부한 내용은 사라지지 않았다.


12월의 어느 토요일. 하루에 공공기관 두 곳의 필기시험이 예정되었다. 오전에는 건국대학교에서, 오후에는 여의도에서 시험을 치르는 일정이었다. 둘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오전 시험을 최대한 빨리 마치고 출발하려고 계획했다. 3시간 30분간 인성검사, 시사논술, 금융경제 일반 상식 시험에 임했다. 그간 공부한 내용이라 어렵지 않게 시험을 마치고 1등으로 퇴장할 수 있었다. 바로 여의도로 향하며 약술 노트를 훑었다. 간신히 지각을 면한 두 번째 시험장에서는 전공시험을 객관식으로 치렀다. 한 번씩 봤던 내용이라 생소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필기시험 두 번을 치르니 허기진 하루가 끝났다.  

- 12.10.(토) 필기 두 탕 뛴 날


여러 공공기관의 필기시험을 경험해보니 시험 난이도가 다소 어려운 곳도 있지만, 어떤 기관은 대체로 평이하게 출제되는 곳도 있었다. 내가 자신 있던 시사 논술이나 전공 시험을 치르는 곳은 필기 합격 소식이 이어졌다. 그 덕분에 취업준비 초반과는 달리 면접에 참여하는 날이 많아졌다.



여러 면접 덕분에 경험이 쌓였는지 여유가 생겼다. 아울러 필기로 연습된 시사 이슈와 발표 연습 덕분에 스피치 면접은 어렵지 않았다. 공공기관 취업을 준비하기 전에는 한 마디도 제대로 하기 어려웠던 토론 면접에서 진행자를 자처해 토론 내용을 이끌었고 적막이 흐르는 면접장에서 재치를 발휘한 대답으로 면접관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날도 생겼다. 영어 면접에서는 영어 잘 못한다고, 그냥 대놓고 말했다. 점차 면접에 익숙해지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오기가 생겼다


내가 단단해진 느낌이 들었다. 탈락 소식이 들려도 의연해지고 오히려 오기가 솟았다. 떨어질수록 이 승부의 끝장을 보고 싶었다.


모 공공기관에서 최종 합격 문자를 받았다. 어쩐지 필기도 쉬웠고 실무진과 임원 면접도 괜찮게 봤다고 생각해서 드디어 취업 준비가 끝났다는 기쁨을 만끽하려는 찰나, 2분 만에 정정 안내 문자가 왔다. 나는 최종 탈락이라고, 처음 문자가 잘못 나갔다고 사과를 했다. 합격자에게 불합격을 불합격자에게 합격 문자를 전송한 것이다.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이 더러운 세상을 다 엎어 버리고 싶었다. 대체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지. 왜 나만 안 되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고 화가 가라앉자 이성이 돌아왔다. 어차피 내 길이 아니었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니었다. 일희일비할 여유가 없었다. 그냥 내 길을 가야만 했다.

- 12.15.(목) 최종 합격 번복 사건


그렇게 연말을 필기와 면접, 분노와 오기로 채우다 보니 어느새 12월 31일이 되었다. 멘토 선배를 비롯해 10개월간 연을 맺었던 부서원분들과 작별을 하며 마지막 퇴근을 했다. 비로소 나는 진정한 청년 실업자가 되었다. 인생 최초로 소속이 없는 상태로 새해를 맞이했다. 문득문득 불안감이 생겼지만, 계속 이어지는 면접에 참여하느라 연초도 바쁜 날이 지속되었다. 새해 첫 주에는 면접 세 건을 소화하느라 한 주를 다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다른 최종 면접에 참여했다.


모 금융형 공공기관 최종면접이었다. 내가 준비하던 금융 업무도 가능하고 청년의 꿈과 미래를 위한 고유 사업을 운영하는 곳이라 평소 관심이 많던 공공기관이었다. 필기시험 느낌이 좋았는데 그 덕에 합격하고 실무진 면접도 잘 본 것 같았다. 내가 면접 분위기를 주도한 것 같았다.

하지만 최종 면접은 달랐다. 이전 면접의 여유로운 자세는 사라지고 지난번 고배를 마셨던 최종 면접의 공포가 다시 살아났다. 긴장을 풀어보려 해도 절로 떨리는 입과 다리는 제어할 수 없었다.

내게 질문이 들어왔다. ‘친구의 잘못을 목격할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도 떨려서 내 목소리가 염소로 변한 것 같았다. 떨렸지만 최대한 양심적으로 원칙적으로 접근해서 답변했다. 모범 답안을 읊는 느낌이었다. 면접장을 나오면서 직감했다. 망했다. 또 기회를 날려버렸다.

- 1.3.(화) 최종면접 마치고 울적한 날


면접을 마친 길, 온종일 정장 차림으로 구두를 신고 걸으니 몹시 춥고 다리가 아팠다. 내 주위에는 수많은 직장인이 제각각 걸음을 옮겼다. 다들 어딘가 갈 목적지가 있는데 나는 대체 누구며 어디를 향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회사 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나도 회사 욕 좀 하면서 제발 소득세를 납부하는 날이 오기를 바랐다. 면접을 망쳤다는 망상에 빠져 그냥 주저앉고 싶은 날이었다. 그 순간 언젠가 선배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A late bloomer 늦게 꽃 피우는 사람



모든 건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고. 사람이 하고 싶은 일에는 길이 있다고, 꿈과 비전, 노력으로 가면 분명 노력이 배신하지 않는 날이 온다고 멘토 선배가 전해줬다. 봄이 되면 새순이 돋고 꽃이 피고 계절이 지나 열매가 맺는 것처럼 어쩌면 삶도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여물기 위한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그래, 나의 결실을 맺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이다. 기회는 계속 이어졌다. 지칠만하면 한 번씩 알려주는 서류합격과 필기 합격 메시지가 자꾸 나를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게임의 결말을 보고 귀향을 해도 늦지 않았다.




1월의 어느 저녁 시간. 집에서 홀로 식사를 준비하는데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최종 면접 결과를 확인하세요.


지난번 최종 면접을 망친 공공기관이었다. 보나 마나 탈락이 뻔할 텐데 귀찮아도 확인 작업은 필요했다. 채용 홈페이지에 접속해 인적사항을 입력하고 엔터를 쳤다.




최종 합격을 축하합니다. 임용 일정을 안내합니다.


??? 합격? 임용? 대체 무슨 말인지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다. 내가 합격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또 오류가 발생한 것일 수도 있으므로 인사 담당자에게 전화해보았다.


"네 합격하신 거 맞아요. 울지 마시고요."


드디어 백수 탈출이라니. 내가 금융형 공공기관에 최종 합격하다니. 드디어 취준생을 마감하게 되는구나. 믿을 수 없는 짧은 순간에 지난 1년 10개월간의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은 지난 날의 실패를 모두 보상했다.

 

A minute's success pays the failure of years!




다음 이야기 : 공공기관 신입사원의 출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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