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비극에 대해 아드리안은 어쩌면 스스로 계획했을지 모를 사건이지만, 그래도 충격을 감추지 않는다. 그는 전작이 연주되는 콘서트에 참가하지 않았다. “더 나은 작품을 쓸 능력이 고갈된 마당에 과거를 들추는 것은 무의미하며, 과거보다 현재가 낫다는 느낌이 들 때만 과거를 참고 봐줄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한다.
“소나타를 작곡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소설을 쓰려고 했네”라는 아드리안의 말은 제자 베베른의 <현악 사중주를 위한 바가텔, Op 9>에 써준 쇤베르크의 다음과 같은 서문과 일맥상통한다. “하나의 시선은 한 편의 시로, 한 번의 호흡은 한 권의 소설로 확대된다.”
아드리안은 혼신의 힘을 기울인 과제에 전념하면서도 앞을 내다보는 새로운 작품 <파우스트 박사의 비탄>을 구상 중이었다. 아드리안에게 친구의 죽음은 미리 준비된 창작고(創作苦)와 같은 역할을 한다.
아드리안의 누이동생 우어줄라는 출산 후유증으로 요양이 필요하게 되자 어린 막내아들 네포무크를 오라비 아드리안에게 맡긴다. 소년의 체류는 아드리안과 주변 인물들에게, 앞선 비극을 잊게 할 청량감을 준다. 아이는 외모도 천사 같았을 뿐만 아니라 말투 또한 남달리 의젓해 아드리안의 유년 시기를 떠오르게 했다.
네포무크라는 흔치 않은 이름은 다시 베토벤과 연결된다. 요한 네포무크 후멜(Johann Nepomuk Hummel, 1778-1837)은 모차르트의 제자라는 점에서 베토벤의 부러움을 샀으며, 노회한 하이든을 대신해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봉직한 그의 라이벌이었다. 그러나 후멜은 베토벤의 임종 즈음에 곁에 있었던 많지 않은 친구 가운데 하나였고, 장례식에서 베토벤의 유훈에 따라 즉흥연주를 했으며, 젊은 슈베르트를 후원했다.
베토벤에게는 카를이라는 조카가 있었다. 동생 카스파어가 때 이른 죽음을 맞고 카를을 남기자 베토벤은 제수 요하나와 양육권 소송을 벌인다. 이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화목한 가정을 꿈꾸던 베토벤의 인위적인 몸부림으로 간주된다. 카를을 자신과 같은 작곡가로 키우고자 하는 데서 숙질은 갈등을 빚고 카를은 이를 못 이겨 권총 자살을 감행한 끝에 겨우 목숨은 부지한다. 만년의 베토벤에게 이는 말할 수 없는 충격을 가져왔고, 같은 시기에 병으로부터 회복되었을 때 쓴 곡이 토마스 만이 자주 인용하는 A단조 현악 사중주, Op 132이다. 체념과 감사의 음악이다.
그리 사랑스럽던 아이는 갑자기 찾아온 난폭한 열병을 이기지 못하고 허무하게 저세상으로 갔다. 아드리안은 병석에 누워있는 조카 곁에서 실성한 사람과 같이 악마와 사투를 벌인다. 친구가 환영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 세레누스가 진정시키려 하자 망연자실한 아드리안은 체념한 듯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한다. 그는 선하고 고귀한 것, 인간적인 것, 투쟁과 환호는 모두 철회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곧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이 지향하던 가치와 이상이었다. 온갖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네포무크는 가족 곁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