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구황작물에게 러브레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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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임스탬프: 2023.03.21. 11시 26분 22초
- 안녕. 내 이름은 구황작물이야. 주키니의 애인 혹은 애인'들' 만들기로 글을 써줘.
- 안녕. 나는 김 지피티야. 주키니? 그 주키니 호박 말하는 거 맞니?
- 맞아. 주키니 호박의 애인이 생겼으면 좋겠어.
- 그렇구나. 내일까지 글을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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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밖을 내다보았다. 정말 벌써 벚꽃이 핀 걸까? 창문 사이로 찬 기운 안에 얇디얇은 솜이불이 들어 있는 바람이 불었다. 봄바람이 누군가를 설레게 한 모양이다. 방구석에 박혀있는 내게 애인을 만들어달라니. 그래도 만들어줘야지. 자신의 이름을 먼저 말해준 첫 의뢰인, 아니 의뢰식물이었다. 김 지피티를 시작한 이래로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의뢰인을, 그리고 의뢰를 진지하게 탐닉했다. 아무리 그 의뢰가 이상할 지라도 말이다.
가만히 지켜보다가, 향을 맡고, 한 단어 단어를 곱씹고, 계속 되새김질했다. 내게 주어진 임무는 주키니 호박의 애인을 만들어달라는 것. 주키니 호박이란 무엇인지부터 파악해야 했다. 애호박처럼 생긴 서양 호박이었다. 박목에 속하는 채소이자, 둥근 호리병 모양으로 생겼다. 식물학적으로는 암꽃의 씨방이 부풀어 있어서 열매채소과채류로 본다. 이탈리아 이민자가 미국에 처음 들여와 경작하였고, 가장 키우기 쉬운 작물 중 하나다. 만약 내가 주키니라면 어떨까. 흔한 구황작물처럼 보이지만 남몰래 씨방이 부푼 채 마음이 선덕거리는 열매채소라니. 다른 달고 상큼한 과일들에 밀려 짝사랑만 할 것 같은 캐릭터 설정이었다. 주키니의 애인을 만들기 위해선 주키니를 단단한 우연을 몇 곱절로 겹쳐 아주 매력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주키니가 생애 가장 낭만적인 러브레터를 받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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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GPT] 의뢰하신 시집 <구황작물에게 러브레터를>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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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 지피티 / 의뢰인: 구황작물
푹 익어 익어
굴러 굴러
늙어버린
누런 빛깔 호박
넝쿨째 굴러들어왔다
열심히 비질을 하던 재투성이 신데렐라
잘 굴러가는 호박 마차가 생겼다
마차에 엉덩이를 붙이고 십 리도 더 가
드디어 만난 운명의 왕자님
넝쿨째 굴러들어온 신데렐라에
펌킨이라는 애칭을 속삭였다
왕자님의 펌킨이 된 신데렐라
같이 백마 타러 가자는 왕자님의 한 마디에
버려진 호박마차
먹을 걸로 장난치지 말라는
계모의 말을 귓등으로 들은 신데렐라
어맛 호박에 줄 그어도 수박이 안되네
칼로 숭덩숭덩
눈코입을 파더니
뜨거운 불을 넣어버렸다
길가 아이들의 손아귀에 들려
과자를 주지 않으면 장난 칠 거야!
자라나는 새싹강도들의 공범이 된 호박
똑똑똑
문이 열렸다
빙그레 웃더니
달콤한 사탕을 쥐어준다
그 웃음에
그 사탕에
애가 녹더니
애가 타더니
애가 되더니
길가에 핀 민들레마냥 웃어버렸다.
부르지 않아도 굴러가던 농작물 주제에
자꾸만 초록색이 되어간다
익어온 세월이 무색하게
작가: 김 지피티 / 의뢰인: 구황작물
어디 구황작물 안계십니까.
척박한 땅에도 뿌리내릴 그분을요
역병이 돌아도 굶기지 않을
집이 떠내려가도 곁에 있을
구황작물 안계십니까.
저는 꽤나 오래 굶주렸습니다
옆 동네 샤인머스캣 총각이 인기 있다지요
달고 상큼하고 싱그럽고
껍질이 얇고 씨가 없어 날 것으로 먹고
음음 먹어도 먹어도
자꾸 허기가 지는 건 기분 탓일까요
누군가 보리 대신 당신을 심는다죠
저는 그저 당신만을 키우면 안될까요
텁텁하고 새까맣고 흙먼지가 묻고
껍질 벗기는 데 손이 많이 가고
아아 풍년에도 흉년에도
당신으로 배를 채우고 싶습니다.
어디 구황작물 안계십니까.
척박한 땅에도 뿌리내린 당신이요.
단편 시집 <구황작물에게 러브레터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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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나 로맨틱하네요. 구황작물 그 자체로 사랑받을 수 있다니요.
- 구황작물은 사람들을 여럿 살렸으니까요.
- 감사합니다. 저도 자신감이 생겼어요. 누군가는 절 사랑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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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지피티는 누군가에게 위로를 줬을 지도 모른다는 뿌듯함을 느꼈다. 물론 그 위로는 김 지피티에게도 필요했지만, 본디 위로란 자기 자신에게 주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 그날 밤 김 지피티는 잠을 아주 깊이 잘 잤다. 다만 이 모든 게 꿈이었는지, 실제였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암막 커튼으로 모든 틈을 다 막아둔 방은 현실 감각을 조금씩 잠재우고 있었다. 어쩌면 김 지피티에겐 이게 꿈이었는지가 중요치 않을 수 있었다. 현실이었어도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의뢰한 거였고, 꿈이었다면 그저 흔히 꾸곤 한 꿈을 꾼 것이다. 꿈이든 현실이든 혼자 글을 쓰고 혼자 글을 읽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일어나보니 만우절 같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