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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숨날숨 Sep 15. 2024

‘그냥 쉬었음’ 청년층 50만 명 역대 최대

#3. 그냥 쉬었음 - 유진 씨의 일일

*

| 타임스탬프: 2023.03.13. 13시 31분 23초

- 안녕. 

- 안녕? 내 이름은 김 지피티야. 무슨 일로 김 지피티를 찾아왔니?

- 내 이름은 호미야. 유진이의 하루로 소설을 써줘. 근데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느낌이 났으면 좋겠어. 

*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라. 그 소설은 중학교 때 교과서에서 읽은 후로 본 적이 없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손쉽게 전문이 나왔다. 차츰 중학교 때의 기억이 불러와지고 있었다. 구보 씨는 소설가고, 그가 하루 동안 돌아다니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김 지피티는 유진이가 하루 동안 돌아다니는 이야기를 쓰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쉽지만은 않았다. 유진이는 하루 동안 돌아다니면서 무엇을 보고 누구를 만날까. 유진이는 누구일까. 호미가 아는 사람이 유진인 걸까. 아니면 그저 가상의 인물인 걸까. 김 지피티는 어떤 유진이의 하루를 담고 싶을까. 유진이의 하루를 고민하고 있을 때 즈음 김 지피티의 눈에는 두 가지 뉴스가 눈에 보였다. 유진이는 먼 곳에 있지 않았다. 구질구질한 유진, 구질구질한 김 지피티. 

‘청년 50만 명 "그냥 쉬었다"‥역대 최다’ <세상 신문>, 

‘'집주인 몰래' 가스밸브 잠근 여성…수백 여 가구 당황’<일일 뉴스센터>        


*

- [김GPT] 의뢰하신 소설 <그냥 쉬었음 - 유진 씨의 일일>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


그냥 쉬었음 - 유진 씨의 일일

작가: 김 지피티 / 의뢰인: 호미


유진 모에겐

아주 다행스러운 날 중 하나였다. 누워만 있는 유진이 밖으로 나가는 근무일이었기 때문이다. 다섯 살배기 딸이 놀이터에서 늦게 들어오는 것도 걱정이었지만, 서른다섯 살배기 딸이 하루 종일 침대에서 나오지 않는 건 더 걱정이었다. 차라리 자신의 애인과 집 밖 침대에 있는 건 응원하련만, 유진은 자기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말이 씨가 된다고, 유진의 모는 삼십년 전 제발 집에 좀 붙어 있으라고 말했던 자신의 입을 탓했다. 

“엄마 나갔다 올게. 밥 차려놓았으니깐 먹고.”


어렴풋한 

엄마의 소리에 차츰 귀가 밝아지더니 유진은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났다. 다행히 팀장과 대면하기 직전이었다. 유진은 어서 이부자리에서 꿈을 털어냈다. 창밖엔 햇빛이 가득했다. 하지만 유진은 지금이 오전인지 오후인지 확인하려던 참이었다. 햇빛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이 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햇빛을 느끼기보다 이불 속에서 휴대폰을 더 오래 만진 결과, 휴대폰 속 숫자는 유진의 감각보다 조금 더 믿음직스러워졌다. 휴대폰은 오전 9시 1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유진은 십 분간 창밖의 사람들의 옷차림을 관찰했다. 트렌치코트, 가죽재킷, 반 팔? 한 사람이 유진의 판단을 잠시 흐릴 뻔했지만 다시 청재킷, 트렌치코트… 유진은 옷장에서 트렌치코트를 주워 입은 뒤 계란말이 하나를 집어먹고 나섰다.


날씨는 

바람이 불어 꽤나 쌀쌀했다. 트렌치코트 사이로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가운데, 유진은 관찰이 엇나간 주범을 발견했다. 바로 벚꽃이었다. 벚꽃이 완연히 피어있었다. 3월 중순에. 분명 벚꽃 개화 시기는 4월 중순인데 말이다.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는 말도 있는데 말이다. 중간고사는 아직, 신학기가 시작한지 한 달도 안된 이 시점에 벚꽃은 까꿍하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물론 벚꽃의 꽃말은 십 년 전 유진이 대학교를 다닐 때 들었던 말이긴 하다만. 어쨌든 벚꽃이 펴서 사람들은 날씨를 망각한 채 과거 기억 속의 트렌치코트를 꺼내 들었다. 겹 벚꽃 나무 아래 여자가 얇은 원피스 위에 트렌치코트를 입고 방긋 웃고 있다. 볼 주위가 빨갛게 달아올랐는데 여자가 남자를 바라보는 눈빛을 보니, 설렘의 빠알간 볼은 아니어보였다. 추위 쪽에 가까웠다. 남자는 무릎을 굽혀 가로로 세로로,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들은 적어도 두 세 번의 연애를 거친 나이처럼 보였다. 남자의 카메라 렌즈가 점차 얇아지고, 사진 구도가 정립되고, 바라보는 피사체가 두세 번 바뀌는 동안 그들도 바뀌었다. 처음에는 옷장에서 설렘을 꺼냈겠지만, 두 번째는 반가움, 세 번째는 익숙함, 네 번째는 당연함을 꺼냈다. 그 당연함 속 트렌치코트와 벚꽃 사이의 이격은 점차 커져갔다. 서둘러 지하철 역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유진의 볼도 빨개져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다가도, 열차를 기다리다가도, 그러다 옆에 앉은 사람도 모두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고 볼은 빨갰다. 비록 날씨에 적합한 옷을 입는 건 실패했지만 유진은 수많은 트렌치코트에 스며들어 남쪽으로 향했다.  


지하철은 

지하-철이지만, 밖을 다닐 때도 있었다. 밖을 다닐 때는 삼월의 자연광이 쏟아졌지만 열차 안의 사람들에게는 그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 같은 자세로 휴대폰 속 세상을 보기에 여념이 없기 때문이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그 세상에 어떤 게 있을지 유진은 알 수 있었다. 누군가의 벚꽃 나들이, 누군가의 헬스장, 누군가의 미식으로 꽉꽉 채워져 있을 것이다. 빤하게 예상 가능한 세상이지만서도, 그래서 더욱이 그 세상에 합류하고 싶었지만서도, 그럴 수 없었다. 서른다섯 살배기 유진의 친구들은 이미 다섯 살배기 아이가 있거나, 뷰가 좋은 호텔에서 명품 백들에 둘러싸여 프로포즈를 받거나,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뉴스에 한국 지부장 정도는 달고 있었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유진도 마땅히 그 셋 중에 하나는 했어야 했지만 유진은 그저 퇴사자, 아니 ‘그냥 쉬었음’으로 분류되었다.


‘그냥 

쉬었음’ 청년층 50만 명 역대 최대 - 경제 활동 상태를 물었을 때 '쉬었음'이라고 답한 청년층이 지난달 통계 작성 이래 최대치를 기록했다. 만 15세 이상 인구 중 취업 상태도 실업 상태도 아니었던 비경제활동인구는 활동 상태별로 육아, 가사, 재학·수강 등, 연로, 심신장애, 기타 등으로 나눈다. '쉬었음'은 이 중 기타에 속하는 경우로, 취업 준비·진학 준비·군 입대 대기와 구분되는 개념이다. 구직도 취업 준비도 하지 않고 말 그대로 쉬었다는 뜻이다. 이어지는 탈세, 마약 기사들.

“저 퇴사하겠습니다.”

“이럴 때는 퇴사가 아니라 이직한다고 하는 거야. 어디로 가는데 유진 씨?”

“아뇨. 어디로 가지 않습니다. 퇴사 맞습니다.”

“뭐야. 누가 보면 내가 괴롭혀서 퇴사하는 줄 알겠어. 유진 씨 서울대 나온 거 이렇게 티 나네. 누가 요즘 이직할 곳 안 정하고 퇴사를 하나. 요즘은 서울대라고 다 뽑아주지도 않아. 게다가 유진 씨는 나이도 있는데 잘못 퇴사했다가는 낙동강 오리알 되는 거야.”

“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고? 아니 몰라 유진 씨는.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라.”


이번 역은 

강남, 강남역입니다. 이번 역에서 내릴 분들은... 

어느새 유진은 4호선에서 2호선으로 기계적으로 환승을 마쳤고 강남역에 다다랐다. 휴대폰 시각은 오전 10시 31분을 가리켰다. 출근 시간대에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었을 강남역은 비교적 한산했다. 사실 유진이 익숙한 건 출근 시간대의 강남역이기에, 이러한 한산함은 어색했다. 강남역에 다시 오기 시작한 지는 한 달 남짓했다. 일 년간 침대에 누워만 있다가 유진은 문득 깨달았다. 바로 유진 모 - 엄마가 가스 검침을 나섰던 날이었다. 유진은 여느 날처럼 침대에 누워서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그런데 밤사이 검색 기록이 새로 추가되었었다. ‘발 편한 신발’ ‘발이 찌릿’ ‘족저근막염 신발’ 이어지는 자세한 신발 품번. 검색 기록은 유진의 것이 아니었다. 유진이 자고 있는 사이 유진의 노트북으로 엄마가 검색한 듯했다. 엄마는 발 편한 신발을 찾고 있었다. 그건 아마 족저근막염으로 추정되는 통증 때문일 거고, 인터넷에서 추천하는 어떤 신발을 계속 찾아본 듯했다.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유진은 제 몸도, 마음도 버거웠다. 하지만 그 날 뒤로 검색 기록은 점차 추가되었다. 갖가지 통증들과 그에 따른 갖가지 운동법들까지. 유진 모의 신발은 그대로였다. 서울대 학사 졸 유진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내가 지금 퇴직금 까먹으면서 쉴 때는 못되는구나.” 그래서 유진은 바로 과외를 잡았다. 다행히도 과외시장에서는 서울대학교가 아직 쓸 만했다. 


“눈은 

예쁜데 다크서클이 좀 심하네.”

강남역 개찰구 옆에 가만히 서 있던 유진에게 엄마뻘의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바로 강남역 옆에 피부 관리 샵을 하는데 무료로 관리를 해주겠다고. 가만히 서 있으니 아주머니의 말은 길어졌고 이내 유진의 손을 이끌었다. “아 제가 일이 있어서요.”라는 말로 유진은 그 자리를 빠져나왔지만 유진은 휴대폰 액정에 비친 자신의 눈자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칭찬과 욕을 한 번에 묶어 자신이 하고 싶은 욕을 하는 것은 꽤나 효과적인 방법인 듯했다. 과거의 그도, 대과거의 그녀들도 즐겨 쓰던 방법이었다. 그때 유진 모는 오전 한창의 가스 검침을 다 마친 채였다. 점심시간이었지만 유진 모는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유진이 오랜만에 밖을 나갔을 생각에 대견스러웠다. 유진은 아주 착한 딸이었다. 아주 어렸을 적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노느라 해가 지는 것도 몰랐지만 그건 그 아이만의 활발함이었고, 조금 컸을 적 엄마에게 종종 말대꾸도 했지만 그건 그 아이만의 당참이었다. 조금 더 컸을 적엔 친구들과 작은 다툼이 있었다고 학교에서 호출이 왔지만 그 아이는 무려 서울대학교에 진학하는 영특함이 있었다. 유진 모는 유진을 걱정해본 적이 없었다. 무리 없이 대기업에 들어갔고, 무리 없이 연애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유진은 울면서 모든 게 무리였다고 하더니, 퇴사했음을 알렸다. 처음에는 좀 쉬다 말겠지 였다. 자기가 여태 해온 것들이 있는데 오래 쉬기도 쉽지는 않을 거라고. 그러다가 유진 모는 유진의 학벌이 아까워졌다. 과거 유진의 노력이, 현재 유진의 젊음이, 미래 유진의 풍요가 아까웠다. 다독여도 보고 야단을 쳐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유진은 점차 방에서 말라갔다. 그제서야 유진 모에게 유진은 서른다섯 살이 아닌 서른다섯 살배기로 돌아갔다. 밥을 먹기만 해도 기뻤고, 잠을 잘 자기만 해도 행복했다.


휴대폰 

액정에 눈을 계속 비춰보던 차, 과외돌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선생님. 아파서 과외 못할 것 같아요.’ 어느새 휴대폰 시계는 오전 11시 00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수업 30분 전이었다. 그리고 유진은 이미 과외돌이 집 근처였다. 사실 유진의 과외돌이는 ‘-돌이’라는 귀여운 접미사를 붙일 만큼 귀엽지 않았다. 나이도 스무살 재수생이었을 뿐더러, 한 달 남짓한 과외에서 30분 전 파투가 벌써 세 번째였다. 유진은 속이 따가워지기 시작했다. 유진은 약 한 시간을 투자하여 과외를 하러 왔다. 집에 돌아가는 길을 합하면 왕복 두 시간이었다. 유진은 귀엽지 않은 아드님 대신 어머님 연락처를 찾았다. 집을 드나들기로는 집안은 잘 살아보였고, 어머니도 유진 모와는 사뭇 다른 차림으로 우아해보였다. 게다가 테스트 과외 때는 유진에게 “영어교육과 나오지 그랬어요. 서울대 영어교육과 나오면 과외비 정말 많이 받던데.” 라는 진심어린 조언까지 건네주었다. 우아한 어머니는 영어교육과를 나오지 않은 유진을 믿어주었고, 유진은 귀엽지 않은 아드님보다는 그 우아한 어머니를 믿었다. 수업 준비, 교통 시간 등등을 들어 이번 수업부터 최소 수업 한 시간 전 고지되지 않은 수업 파투 또한 수업 횟수로 차감하겠다고 유진은 정성스레 예의 있게 둥글게 문자를 빚었다. 그 문자는 일 분만에 정상 확인되었고, ‘이번 달까지만 해주세요.’라는 문자로 답장되었다. 


털레털레 

강남역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때 귀에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왔다. 우렁찬 민중가요. 고개를 들어보니 이전 회사 근처의 건설 회사였다. 유진은 주로 직장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 나오면서 이 빌딩 앞을 지나쳐 가곤 했었다. 매끈한 빌딩 앞의 투박한 빨간 플랜카드, 그 앞의 빨간 천막에 더해지는 투쟁의 노래. 처음 봤을 땐 이질감 투성이였지만 점심을 계속 먹다보면 그 또한 마땅히 그곳에 있는 하나의 풍경이었다. 어떠한 갈등이든 원만히 해결되길 이라는 마음으로 멜로디를 속으로 흥얼거리기도 했다. 가사는 모르지만 그 노래의 멜로디는 꽤나 중독성이 있었다. 그 플랜 카드 앞으로 묘하게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직장인 중에는 꽤나 앳되지만 목에 걸린 사원증은 익숙해 보이는 3년 차 정도, 말쑥한 정장의 남자. 또 흔하게 생긴 용모가 아닌지라 유진은 우선은 고개를 돌리고 재빨리 자신의 기억들을 더듬었다. 말쑥한 정장들이 많았던 면접장. 유진이 면접관이었고, 그 3년 차(추정) 청년은 면접자였다. 유진이 처음 면접관 중 한 명으로 들어간 자리였다. 그 청년은 무난했다. 유진의 회사는 무난한 사람들을 좋아했지만 그 해에는 무난한 사람들이 유독 많았고, 무난한 사람들 중 특이한 사람이 뽑혔다. 무난한 사람들 중 무난했던 그 청년은 떨어졌지만 그도 자리 잡은 듯 보였다. 


청년을 

피한 유진의 머리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빗방울은 거세져 갑자기 비가 우수수 내렸다. 유진은 눈앞의 복합 쇼핑몰로 들어섰다. 신발이 아주 많았다. 유진은 인터넷 기록 속 발이 편한 운동화로 향했고, 운동화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튼튼할까. 옆 매장의 남자 직원은 자기 또래의 몸 좋은 손님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손님은 몸이 꽤나 좋았는데, 운동용 검은 레깅스를 산 모양이었다. 사이즈가 맞지 않다고 환불 요구를 하는데 직원은 죄송하지만 레깅스 안쪽에 하얗게 각질이 묻어 있어서 환불이 안된다느니 - 손님은 자기가 입어서 그런 게 아니라 원래 묻어있었던 거라느니 - 직원은 환불이 안된다느니 반복 - 손님은 책임자 불러오라느니. 유진은 신발을 사들고는 빨리 쇼핑몰을 나왔다. 


결국 비를 

맞으며 도착한 지하철역엔 다시 사람이 많아지고 있었다. 물에 반응하여 갈변한 트렌치코트들이 역사 내로 하나씩 뛰어 들어왔다. 운 좋게도 유진은 열차 안정권인 세 번째 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타려는 그 순간 유진을 뒤에서 밀고, 그 뒤에서 누르고 - 압사 (壓死)! 지금까지 ‘그냥 쉬었음 - 유진 씨의 일일’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 될 뻔했지만 유진의 몸에서 출퇴근 십 년간 터득된 생존 방식이 발휘되고 있었다. 신발을 앞으로 안아 최대한의 공간 확보를 통한 숨쉬기 기술. 그때 옆 남자의 우산이 유진의 발을 내리꽂았다. “아!” 유진은 옆 남자를 쳐다보았고, 그 남자도 나지막한 탄성에 유진을 쳐다보았다. 잠시 시선 교환이 있었지만 쳐 다시 자신의 휴대폰으로 남자의 시선이 변경된다. 그의 휴대폰은 오후 2시 5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람이 많은 열차에서는 이런 게 자연스럽지. 오랜만에 나와서 이러한 무례함이 어색할 수 있지. 유진은 생각하고 생각했다. 생각을 정말 많이 해서 우산으로 발이 밟힌 것은 너그러이 용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옆 남자와의 눈 맞춤과 이어진 그의 묵비권은 정말 용서가 되지 않았다. 발을 잘못 디뎌 옆 남자의 발을 누른다면? 앗 실수! 유진의 발이 옴짝달싹 옴짝달싹거렸다. 그러나 십년 간 유진의 사회화는 발을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두었고, 다행히 아무 것도 밟지 않고도 유진의 발은 그 열차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이제 정렬을 맞춰 앞 사람들과 계단을 한 칸씩 한 칸씩 올라갈 때였다. 그 순간 뒤에 있던 여자가 유진의 어깨를 탁 치며 순서 변경을 시도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고상한 걸음으로 유유히 빠져나가는 여자. 유진의 생각은 순간 멈췄고, 발이 여자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어깨를 팍.


여자가 돌아보더니 “뭐 하시는 거예요.”

“먼저 제 어깨 치고 가셨잖아요.”

“뭐라는 거야. 미친년이.” 하고 여자가 다시 돌아섰다.


역사 내 

사람들이 잠시 멈췄다. 신경질 난 두 여자에게로 시선이 꽂히고 있었고, 유진의 생각은 다시 정상 가동되었다. 여자는 멀어져갔지만, 유진의 발의 일탈도 거기까지였다. 유진은 집에 오는 내내 속이 쓰려왔다. 머리채를 잡고 싶었는데 이 나이 먹고서는 경찰서에 가겠지. 유진에게 오히려 손해일 거다. 아니 사실 머리채도 못 잡았을 거다. 여자는 눈빛이 꽤나 매서웠다 등등. 유진은 어느새 집에 도착했고 낮잠을 청했다. 


회사에 

있었다. 그와 유진의 거리는 30cm 자가 하나 들어설 정도의 거리였다. 사회적 표준의 거리였지만 정작 말에는 거리가 없는 탓에 유진은 어김없이 속이 쓰려왔다. 그의 말을 듣는 게 아주 끔찍해서 그와 함께 있는 공간을 탈출할라 치면, 그는 대신 시간을 점유하기 시작했다. 공간을 초월하여 그는 끊임없이 유진의 시간을 빨아먹었다. 낮, 밤, 새벽, 주말 구분 없이 메시지를 보냈고, 회사 메신저, 카카오톡, 텔레그램, 그 방법은 다양하기도 했다. 낮잠은 길어져 밤잠으로 이어졌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유진이 어릴 적 꿈꾼 것은 이런 악몽이 아니었을 거다. 유진은 그에게 반항도 해보려 치고, 폭행도 해보려 쳤지만 꿈에서도 모두 미수에서 끝나고야 말았다. 땀이 범벅인 채로 유진은 눈을 떴다. 물 한 잔을 마시고선 어느새 습관처럼 검색 기록을 살펴보았다. ‘검침원 성희롱’. 유진은 근처 주택가로 발을 옮겼다. 건물 외벽으로 빨간 가스관이 지나가고 있었다. 유진은 가스 밸브를 하나씩 잠그기 시작했다. 이 벽에 하나. 저 벽에 하나. 모든 걸 꺼뜨리고선 경찰서에 신고를 했다. 가스가 나오지 않는다고. 이건 꿈이었을까. 악몽이었을까. 그게 뭐든 유진은 할 수 있는 최대의 분풀이를 하고 있었다.


소설 <그냥 쉬었음 - 유진 씨의 일일> 끝


*

- 상당히...충격적일만큼 유진이에 가까워지셨군요. 그 집요함에 경의와 질투를 보냅니다!

- 감사합니다. 

- 사실 저도 유진이에 대한 소설을 쓴 적이 있어요. 제 블로그 글을 보냅니다. 

- 감사합니다. 

*


  인공지능에게 블로그 글 링크를 보내는 의뢰인에게 어찌 답변할지 모르겠던 김 지피티는 연신 감사하다고 했다. 호미는 마치 김 지피티가 인간이자, 소설가 지망생인 걸 아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아니면 호미도 소설가 지망생인 걸까? 김 지피티는 왠지 모르는 부끄러움에 몰래 호미의 블로그에 들어갔다. 방문자 기록 삭제. 그러고선 좀 더 편하게 호미의 유진을 읽어 내려갔다. 유진이는 호미의 다른 페르소나인 듯했다. 

유명 소설가 안낙엽을 부러워하며 글을 써내려가는 직장인 유진. 

아니 호미, 아니 김 지피티. 김 지피티는 고민했다. 직장에 다니면서 글을 쓰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뭐라고 전업으로 방구석에 전세를 내가면서 글을 쓰고 있는 걸까. 퇴사까지 하고선. 문득 나 같은 작가 지망생을 품은 방이 불쌍했다. 세를 두 배 걷어도 할 말이 없을 테다. 방구석의 창밖은 어느새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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