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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뽀끼 Nov 07. 2024

팬티를 뒤집어 입었다.

소변을 보려고 변기에 앉았는데 아뿔싸, 팬티를 뒤집어 입었다. 놀란 것도 찰나, 이게 뭐 별 일 인가 싶다. 요즘 내가 그랬다. 기운 없는 채로 셔츠 단추구멍을 아무 데나 끼워 넣지를 않나, 양말 두 짝이 다른 줄도 모르고 내내 걸어 다니다 밤이 되어 알게 된 적도 있다. 이게 다 불면증에 밤을 지새우는 나날들이 많아지자 생긴 만성피로의 잔해였다. 세련된 돌싱들도 얼마든지 많겠지만 나는 그 대열에 끼지 못했다. 꼼꼼하게 굴 기력도 없고.


나름의 각과 패션센스를 중시하며 온갖 화장 기술을 이용해 최신 여자처럼 굴던 새침한 이십 대도 있었다. 아이라인을 관자놀이까지 뽑아주고 퍼스널 컬러와 상관없는 시뻘건 틴트로 입술을 덧칠했다. 발가락이 비명을 지르도록 구두를 신고 다니거나, 추운 겨울, 살색 스타킹을 신고 벌벌 떤 적도 있다. 뭐, 이젠 모두 과거 일이다.

내게 유일하게 남은 센스라고는 와이존이 부각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 정도랄까? 겨드랑이에 굳센 털이 무성히 자라나도 무심히 넘겨버리는 게, 현재의 나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주 3회 수영을 하며 꾸준히 제모를 해 왔는데 이혼한 뒤로는 수영을 그만뒀다. 애정하던 수영복들은 짐짝 신세로 전락했고 제모도 하지 않게 됐다. 샤워를 하다 종종 ‘누구랑 잘 일도 없고 접영 할 일도 없는 여자의 겨드랑이는 이런 모습이구나.’ 혼자 생각만 해 왔다. 그러다 오늘 문득,

‘제모 한 번 하는 게 어려울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고 만 것이다. 어느 포인트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나를 너무 방치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도 같고, 미관상 별로였던 것도 같다.


점심밥을 고공밥으로 야무지게 챙겨 먹은 뒤 털과의 작별을 선포했다.

‘아디오스 아미고!(잘 가게 친구!)‘

뒤집어 입은 팬티도 벗어젖히고, 시장에서 사 온 꽃무늬 잠옷도 훌렁 벗고선 화장실로 향했다. 뜨끈한 물이 콸콸 나올 때까지 수전을 벽으로 돌려놓고, 오래된 면도기를 꺼냈다. 여전히 건재해 보였다. 날이 좀 무뎌졌대도 걱정은 없다. 장인은 장비 탓을 하지 않는 법. 십여 년 경력의 탄탄한 나의 스킬이 예민한 겨드랑잇살을 다치지 않도록 해 줄게 분명하다. 쉐이빙폼 대신 페이스폼을 덜어 양쪽 겨드랑이에 고루 바른 뒤, 손을 뻗어 보라색 질레트(면도기브랜드)를 꼭 쥐었다.

‘그래. 오늘 다시 새 겨드랑이로 돌려 놓겠…’

띵동!

‘뭐지? 택배인가?’ 하고 잠시 생각하다 다시 질레트를 잡고는 ‘이전의 내 겨드랑이로…’

띵동! 띵동!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와 씨. 망했다.’

얼마 전 주방 환풍기가 고장 나 신고 접수를 해두고 지난주에 예약을 잡아 놓은 게 그제야 생각났다.


좌우 겨드랑이 죽지에 거품을 숭숭 묻힌 채 인터폰으로 달려갔다. 통화 버튼을 누른 채

”앗 잠시만요! 죄송해요!! 금방 열어드릴게요!!! “

다급히 소리친 뒤 화장실로 우다다 뛰어갔다. 정말이지 순간 스피드가 거의 9.8(내 인생 가장 빠른 달리기 속도를 10이라고 본다면)? 중학생 이후로 가장 빠른 속도였을 거다. 와중에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엄지발가락에 힘을 바짝 줘서 쥐가 나기 일보 직전으로, 찬 지 더운지도 모를 따가운 물줄기에 3초 만에 온몸을 헹궈낸 뒤, 수건 한 장으로 머리부터 발 끝까지 후루룩 닦아내고, 뒤집어 입었던 팬티도 그대로 입고, 시장산 꽃무늬 원피스에 몸을 욱여넣은 뒤, 꼼꼼하게(출산과 동시에 낳아버린 그 꼼꼼함을 주워다가 잠시 다시 꼼꼼해진 상태로) 옷장으로 달려가 니플패치까지 툭툭 달고 후다닥 현관문을 열었다.


몇 초간 나를 바라보던 기사님은 조용히, 그러나 선명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셨다.


“와, 머리에서 김이 나네요.”


후드가 고쳐지는 동안 엉망이 된 욕실을 정리했다. 기사님이 돌아가신 뒤 급발진에 넋이 나간 종아리를 달래주느냐 한참을 마사지해 주어야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노라니, 매끈한 겨드랑이 가져봤자 당장 뭐 쓸 일(?)도 없고 굳이 밀어서 뭣하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게 아닌가? 내 인생 즐거운 에피소드 한 페이지 얻었다 생각하며 가슴에 두 손을 얹고 꿀잠에 빠져들었다. 오랜만에 한 운동의 효과는 가히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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