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친 시도에 민망했을 영업부에 전하는 심심한 사과
제약회사 마케팅을 하면서 한 가지 아쉬웠던 부분은 '새로운 것'을 할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제약업계 마케팅은 한 마디로, '제약'이 많았기에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예를 들어, 2pg 짜리의 브로셔 한 장을 만들더라도
문구마다 공신력 있는 journal에 게재된 논문을 reference로 삼아야 했으며
'최고' '가장' 등의 최상급 표현은 써서 안되며
조금이라도 오인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표현 역시 쓰지 말아야 한다.
제품과 관련해서 새로운 연구가 끊임없이 진행되고 발표되는 신약의 경우에는 해당 data에 대한 정보를 담는 것만으로도 브로셔 제작의 의미가 있고, 이를 전달하는데 가치가 있지만
이미 시장에 출시된 지 오래된 약물의 경우에는 딱히 브로셔에 새롭게 담을만한 내용은 없었다.
영업부가 call 거리로 활용하는 브로셔에 새로운 정보를 담을 수 없다면 나는 기억에 남는 메시지라도 넣고 싶었다. 지금은 규제가 강화되어서 외국계 제약회사의 경우 1만 원 이하의 판촉물도 전달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지만, 내가 갓 마케터가 되었을 때는 1만 원 이하의 판촉물 제공이 가능한 상황이었기에, 브로셔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한 번 더 각인시킬 수 있는 판촉물을 고르는 데 엄청난 고심을 했다.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쓰기로 결심한 글이니
고심을 거듭해 내가 내놓은 브로셔와 판촉물 세트 중 가장 뜨거운 반응을 보였던 세 가지만 얘기해 보자면...
1) 60개 넘는 경쟁제품이 있는 시장에서 유일한 오리지널 제품이었기 때문에
오리지널 제품을 강조하기 위한 메시지(브로셔 이미지는 그냥저냥 무난했던 것 같다)와
가짜 휘발유 판별 키트 (아래 이미지와 같은 카드 형태)
"휘발유도 가짜/진짜가 중요한데, 먹는 약에는 더욱더 오리지널리티가 중요!"가 핵심 메시지였다.
2) 명화가 사랑받는 이유는, '원작'이기 때문입니다는 메시지를
다시 한번 오리지널 약과 관련된 메시지로 연결하기 위해
브로셔 앞 면의 이미지를 아래 천지창조 이미지를 넣고, 판촉물은 해당 이미지의 마우스 패드로 제작
3) 그 당시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이 출간되었는데(아래 이미지) 갑자기 나는 거기에 꽂혀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제목에 '하늘'을 그 당시 내가 담당한 제품 이름을 넣어 'XXX과 바람과 별과 시'로 만들어 브로셔의 앞 페이지를 초판본의 느낌과 유사하게 제작하고, 거기에 그 초판본 시집을 판촉물로 제작했다. 메시지 역시, 제품의 오리지널리티와 연결 짓는 것이었다.
매번 같은 이야기를 해야 하니 막연했을 것 같아
나름 야심 차게 준비한 것들이었는데 영업부의 반응은 내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젊은 영업부 직원들은, 신선하다, 새롭다는 반응이었지만
나이가 있으신 영업부 직원들은, 민망해서 이걸 어떻게 주냐는 반응이었다.
그 당시에는 '아니, 뭐가 민망한가? 왜? 이게 뭐 어때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만약 지금의 내가, 그 브로셔와 판촉물을 들고나가야 한다면,
'이걸 뭐라고 하면서 주냐'라는 반응을 충분히 할 것 같기도 하다.
이 자리를 빌려, 의욕이 넘쳐 조금은 '읭스러운' 시도들도 서슴지 않았던 나를 견뎌준 영업부에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