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쉬운 결과
'경력'
신입사원 때는 너무나 쌓고 싶었던 것이지만,
이직을 막 한 사람에게는 내가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실력'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두 번째 회사는 '마케팅'이 관여해야 했던 업무의 범위가 첫 번째 회사와는 차원이 다르게 넓었다.
회사 규모가 2/3 수준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단순히 '마케팅'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미국계 회사라 그런지 1 FTE를 갖고 얼마나 알토란 같이 써먹을 수 있는지, 효율을 극대화하는 느낌이었다.
제품과 관련된 문의 사항 전화들은 모두 나에게 연결이 되었다. 그것이 부작용 보고와 관련된 것이든, 약국에서 걸려온 훼손된 제품의 문제이든 가리지 않았다. 매뉴얼 따위는 없었다. 그냥 부딪히는 것이었다.
'이런 일까지 마케팅이 하는 게 맞나..?'라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업무가 쏟아졌다.
연봉을 많이 올려준 데는 이유가 있었구나.. 싶었다.
해 오던 마케팅 업무의 경우에도 1개의 제품을 맡던 내가 3개의 제품을 맡으면서 내 본연의 업무 자체에 대한 전략적인 접근도 하게 되었다. 나라는 사람 1명이 제품 1개에 온전히 집중해 왔던 대로 일하다가는 모든 일을 다 소화하지 못하고 펑크를 낼 것이기에, 업무의 우선순위를 세우는 법부터 실천했다.
입사 3달 후 '한 명의 몫은 해 내고 있어! 잘하고 있어!' 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던 어느 날,
뜻밖의 이슈가 터졌다.
내가 담당하고 있던 제품들 중 소아용 지사제 A약은 비급여 약물이었고 매출 비중도 작아 회사와 나의 우선순위의 가장 끝에 있는 제품이었다. 그런데 A약이 속해있는 소아 지사제 시장에서 1등을 하던 경쟁품 B와 관련한 안전성 이슈가 프랑스에서 불거졌다. B 성분이 소아의 발달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내 자식에게 몸에 좋은 것만 먹이고 싶어 하는 게 엄마들의 당연한 마음인데, 아이가 아파서 먹는 약에 문제가 있다?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위기는 나의 기회였다.
회사는 신이 났다.
나에게, 해당 이슈로 얼마나 더 매출이 증대될 것 같은지 시나리오 분석을 해 오라고 했다.
'시나리오 분석을 해 와' 정말 이게 다였다.
어떤 데이터를 갖고, 어떤 상황을 고려해서 등등 detail은 아무것도 없었고 빠른 의사결정을 통해 수입 물량을 조절해야 하기에 나에게 주어진 시간도 많지 않았다.
당연할 수 있지만 가장 Optimistic 한 시나리오대로 물량을 준비하기로 결정되었다.
한국은 Globally 너무나 작은 나라라 한국을 위해 갑자기 기존 수량의 8배에 달하는 수입량을 배치해 주기는 어려웠다. 사장님까지 나서서 Global과 회의를 하며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기회다'라고 설득해 물량을 받아냈다. 이 모든 일이 3주도 되지 않아 분석, 결정, 실행(약물 공급)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보았을 때 시장의 결과는 Optimistic 한 시나리오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8배를 예상했지만 5배 정도 수준에서 '지지부진'하고 있었다.
물론 이전 수량을 생각하면 5배도 엄청난 성장이지만..
실패에서 배워야 성장이 있으니 그때를 복기해 보자면
지사제 특성상 그리고 소아 지사제 특성상, 설사를 동반한 유행병이 많이 돌아줘야 한다. Optimistic 한 시나리오에는 일반적인 시장에서 경쟁품 수요를 뻇어왔을 때 + 여름철 설사를 동반한 유행병까지 겹칠 때라는 매우 매우 '이상적인'상황을 고려했다. 그 해 생각보다 수족구나 급성 장염 발병률이 전년보다 낮던 상황이 겹쳐 8배까지는 sales가 폭발하지는 못했다.
외부 원인이 아닌 나를 두고 생각해 봤을 때, 나는 고작 3-4일 동안 desk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과, 접근할 수 있는 모든 data를 활용해 준비했지만, 나는 정작 가장 중요한 영업부의 이야기를 좀 더 세심하게 듣지 못했다.
bottom up으로 취합된 예상 매출 수량과 나의 시나리오를 좀 더 비교해 봤더라면, 나의 Optimistic 한 시나리오가 얼마나 '이상적'인지와 더불어,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경영진들의 의견과 현실의 간극 조율에서 좀 더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어쩌면 그때까지 나 자신에 대한 오만함을 다 내려놓지 않아서였던 걸까? 다른 누군가에게 의견을 구하는 일이 내키지 않았던 것일까?
역시나, 사람은 홀로 설 수 없는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