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애의 끝은 결혼, 결혼의 끝은? 이혼?
나의 연애의 시작은 지극히도 평범했다.
평범한 교육기관에서 범상치 않은 인연을 만났다. 찾았다! 내 사람…
은 여자였다. 나는 참고로 이성애자다. 그렇다면 난 누굴 내 사람이라고 생각한 걸까?
꼰대기질이 다분했던 한 남선생님의 벙개 제안으로 공부를 다 마친 늦은 시간에 우리는 약속장소로 삼삼오오 모였다. 당시에 나는 비교적 가까운 곳에 살았고, 사람 만나는 걸 누구보다 좋아하는 성향의 나에게 그 모임에 안 나갈 이유는 없었다.
들뜬 마음으로 한 주점에 들어섰다. 이게 웬걸.. 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어른들이었고… 뻘쭘하기 그지없는 상태로 시간은 흘러갔다. 나는 말하는 것을 참 좋아하는데… 계속 듣고만 있었다.
뭐라도 마시고 싶었다. 글을 쓰는 지금은 술을 잘 안 마시지만 그때는 나름 좋아했다. 인생이 달달하니 쓰디 쓴 술이 어울렸다(지금은 인생이 쓰디 써서 설탕을 퍼 먹는다). 내 주종은 쏘맥이었는데(쏘맥 조합은 칭찬하기에 입이 아프다) 다른 분들은 계속 막걸리만 드시고 계셨다. ‘다들 막걸리를 좋아하시는구나..’ 그렇다고 내가 손을 번쩍 들고 주문하기에는 동방예의지국에서 막내의 포지션으로는, 더더군다나 술자리에서는 때려 죽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눈치를 보다가 얼른 집에 가야겠다.' 평소 회식 자리에서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도망’ 각을 재고 있던 찰나에 한 명의 아리땁고 조그만 여인이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해요~ 제가 집이 ㅇㅇ라서 조금 먼데.. 고민하다가 그냥 재미있을 거 같아서 왔어요."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나지만 이런 뉘앙스로 말을 했다. 나보다 세 살 많은 언니였다. 언니는 저 말을 함과 동시에 테이블을 빠르게 스캔했다. 그러더니 바로 “어, 여기 소주 맥주가 없네? 못 시키고 계셨나? 이모! 여기 소주 0병이랑 맥주 0병 주세요~ 맥주는 카스로요! “ 전혀 무례하지 않고 오히려 부드럽기까지 한, 세대를 아우르는 그녀의 카리스마!
내 사람이었다.
나는 그 언니를 수업 때나 힐끗힐끗 봤지 이렇게 자세히 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작고 귀여운 언니에게 이런 카리스마가 있다니. 한국에 ‘바람의 아들’ 이종범이 있다면 적어도 그날 나는, 그녀가 휩쓸고 지나간, 술자리의 분위기를 한순간에 바꿔버린 ‘바람의 딸’이 실존하는 것을 본 목격자였다.
바람처럼 내 맞은편에 앉은 언니와 나는 또래를 만난 기쁨에 잔을 나누며 수다를 이어갔고 곧 나는 언니가 나랑 꽤나 비슷한 성격을 가진 멋진 여성(자화자찬 맞다)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아주 일을 잘하는 회사원이었던 언니. 그래서 회식 문화를 그렇게 잘 알고 있었나 보다. 그리고 언니와 나 같은 이런 여성들의 공통점을 찾아냈다. '일할 때는 열심히, 놀 때는 더 열심히!' 어떻게 알았냐고?
화장실에 갔는데 갑자기 언니가 아까 말한 언니의 동네가 떠올라 검색해 봤다. 말도 안 되는 먼 거리에 살고 있었다.
'와… 이 언니.. 놀려고 여기까지 다시 온 거야?'
참으로 멋진 여성이 아닐 수 없다.
그날 우리는 2차까지 신나게 달렸고 어느새 밤은 깊고 우리는 노래방에서 서로의 어깨를 부여잡고 신나는 노래를 열창하고 있었더랬다. ‘선생님’이었던 호칭은 ‘언니’로 바뀐 지 오래..
그리고 집에 돌아가기 전, 기분 좋게 취한 언니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 너 사회생활 쫌 잘하겠다?”
와.. 이 언니 통찰력이 뛰어나다.
그렇게 시작된 언니와의 인연으로 우리는 수업을 받는 내내 같이 놀고 가깝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가 지나가는 말로 나에게 물었다.
언니 : 너는 어떤 스타일의 남자를 좋아해?
나 : 아, 저는 키 크고 우직한 스타일을 좋아해요. 이를테면 군인, 경찰 같은 듬직한 남자?
언니 : 어머, 너 취향 한번 확실하다.
야 근데 되게 신기해.
내 동생이 직업군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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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몰랐다. 맹세코 몰랐다. 이 인연이, 그날 그 주점에서의 우연 또는 필연 같은 바람의 딸과의 인연이 내 인생을 이렇게 바꿔놓을 것이라는 걸. 정말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