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군인과의 장거리&장기연애 그리고 결혼과 외도
우리가 연애를 시작할 당시 남자친구는 강원도 A사단에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경기도에 살고 있었고 그렇게 우리는 장거리 연애를 하게 되었다.
항상 나비처럼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나는 오히려 평일에는 내 생활을 하고 주말에만 만나서 데이트하는 그런 연애가 나쁘지 않았다.
서로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게 가장 바람직한 연애라고 믿었던 우리는 그걸 잘 지켜가면서 아주 평범하고도 재밌는 연애를 했다. 장장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물론 그중 헤어짐도 있었다. 전적으로 그 사람의 잘못된 판단이었고, 수개월 후 다시 돌아와서 싹싹 빌던 그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나는 재회를 선택했다. 그랬으면 안 됐다.
그렇게 또다시 연애는 이어졌고 남자친구는 부대를 옮겨가며 생활했다. 내심 걱정이 되었다. 나는 직장이 있는데,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게 되면 직업 특성상, 같이 이사를 다녀야 한다. 내가 그걸 이겨낼 수 있을까? 군부대는 보통 외진 곳에 있기에 나처럼 도시라이프를 즐기던 나비가 그곳에서도 자유롭게 날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을 하던 중, 자연스레 결혼 이야기가 나왔고 남자친구는 충격적인 말을 했다.
"나 전역할래."
"?????"
이유는 이러했다. 앞으로 소령이 되기 위해서는 중대장이라는 직책을 맡아야 하는데 본인은 요즘 병사들을 데리고 중대장을 할 자신이 없단다. 본인이 군인이 된 것은 전적으로 가난한 가정환경 때문이었고,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전역을 해서 지금이라도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보고 싶다고 했다.
'아, 이게 바로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 건가? 나를 가장으로 만들려는 건가? 그래 우린 딩크족이니 누가 가장이랄 게 없지. 근데 왜 하필 이 타이밍이지..?'
나는 평생 일을 그만 둘 생각이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이 무슨 일이든 나는 그것의 긍정적인 모습을 보고, 내 비전을 만드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나와 정 반대였고, 본인이 그렇게 죽을 만큼 힘들다는데 그걸 내가 강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전국의 수많은 국군장병 여러분들 중, 중대장이라는 무거운 직책을, 그 어려운 걸 해낸 모든 중대장님께 진정으로 존경의 마음을 표한다. 내 남편은 때려죽여도 못했을 거라는 걸 해낸 여러분은 정말 좋은 남편이자 언제나 우리를 위해 수고하는 멋진 군인이길 바란다.
내가 살면서 들은 여러 가지 말 중에 자주 듣기도 했지만, 참 나를 잘 표현해 주는 말이 있다. 바로 '의리'다. 나는 직장에서든 친구관계에서든 의리를 참 잘 지키는 편이다. 이 말을 직장상사에게 직접 들을 수 있었다는 건, 아마 직장을 다녀본 여러분이라면 참 듣기 어려운 말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아, 의리 있다고 해놓고 그럼 이참에 이것도 해!라고 말을 들었다면 그건 의리를 가장한 가스라이팅이었을 것이고, 나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의리가 있으니 더 큰 일을 맡길 것이고 페이도 섭섭하지 않게 올려주겠다고 했다. 나는 어디에서나 최선을 다하고 열정이 넘치는, 내 일에 자부심을 가지는 나름 행복한 자본주의의 노예였다. 아마 남편이 그걸 믿고 전역을 결심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는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가지고 결혼을 했다. 서로 일하면서 젊은 시절에 모아둔 돈이 충분하진 않아도 양가 부모님의 손을 빌릴 만큼 쪼들리지는 않았기에 약간의 대출을 껴서 나름 좋은 동네의 아파트로 신혼집을 차리게 되었다.
신혼집을 차릴 당시, 남편은 드디어 전역을 한 백수상태였지만 그동안 나름 큰돈을 모아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퇴직금으로 대출의 대부분을 상환할 수 있었다. 우리는 경제관념도, 가치관도 매우 잘 맞는 부부였다. 내가 바라던 삶이었다. 대도시의 중심에서 살면서 마트도 가깝고 영화관도 가까워 저녁을 먹고 난 뒤에는 둘이 손잡고 산책하며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고, 나를 만나기 전까지 해외여행이랍시고는 일본 자위대와의 교류행사(?)로 일본에 다녀온 것이 전부였던 그는, 나비인 나를 만나서 같이 나비의 삶을 사는 듯했다. 해마다 해외여행을 가서 남편은 나의 보디가드 역할을 해줬고, 나는 그의 입을 대신해 소통하는 역할을 맡았다. 남편은 신혼여행에서 본 스페인의 바다와 프랑스 니스의 바다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비교적 남편보다는 영어를 잘하고 약간의 잔재주로 스페인어를 할 수 있는 나는 그걸 보여줄 수 있어서 너무너무 신이 났다. 이 세상에 이렇게 예쁜 곳이 많고 맛있는 것도 많으니 우리는 앞으로 할모이 핣지가 되어서도 손 꼭 잡고 다니자고, 나에게는 그게 행복이라고 그에게 말했고 그도 나랑 평생 이렇게 더 넓은 세상을 구경하며 사는 게 꿈이라고 했다.
길치, 방향치인 나에게 인간내비게이션인 남편은 좋은 경호원이 되어주었고, 우리는 연애에 이어서 결혼생활 중에도 싸울 일이 없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인간내비게이션이 없어도, 경호원이 없어도 그동안 혼자 구글맵으로 잘만 돌아다녔다. 혹 길을 잃어도 우연히 마주친 카페와 식당에서의 무계획적인 시간은 음식이 맛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나에게는 여행 그 자체였다. 사실 남편이 필요 없었지만, 그때는 그렇게 칭찬을 해가며 오버를 해가며 남편의 바닥난 자존감을 올려주는 게 좋았다. 적어도 그게 나에게는 사랑이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이름도 유명한 COVID-19... 남편이 직장을 얻는 데 너무 고생을 하게 만든 역병이었다. 군수과를 나온 남편, 10년 가까이 군대에서만 생활했던 전직 대위.. 널리고 널린 대위가 이 험난한 세상의 좁은 취업문을 뚫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직업과는 전혀 상관없는 컴퓨터 관련 자격증을 남편과 같이 공부하며 준비하기도 했었다. 혼자 하는 것보다는 둘이 하는 게 더 재미있고 남편이 스트레스를 덜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의 긍정에너지와 활기를 남편에게 나눠주고 싶었다. 풀이 죽어지내던 남편이 본인이 나보다 조금 더 잘하는 컴퓨터를 나에게 알려줄 때,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안쓰럽기도 했다.
그것이 나를 갉아먹고 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나비였던 나는 어느새 점점 남편과 함께 똥을 굴리는 쇠똥구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내가 선택한 사람이고 참 다정하고 나만 바라봐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사람의 새 직장의 벌이가 어떻든, 우울감을 뿜뿜하든 말든 나는 둘이서 똥을 굴리면 깔깔거리며 굴릴 수 있었다. 떨어지면 또 내려가서 가져오면 되지. 우리가 좋아했던 무한도전 평창올림픽 특집(?)처럼... 미끄러지면 다시 올라가고 도와주고 또 올라가면서 나는 깔깔거렸다. 내가 웃으면 남편은 따라 웃었다. '부부'라는 끈끈함이 주는 일종의 전우애가 있었다. 같이 열심히 살다 보면 또 좋은 일이 생기겠지? 그게 아니어도 괜찮아 '내가 열심히 일해서 남편은 원하는 일을 하며 편하게 살게 해 주자.'라는 마음도 진심으로 있었다. 우리는 딩크족이니까.
그런데 인생.. 어림도 없었다.
*이제 다음 글부터는 본격적인 볼 꼴 못 볼 꼴이 나옵니다. 행복한 결혼생활의 종착역은 여기입니다. 뒷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심호흡 한번 해주세요. 인생 도라방스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