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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iposa Aug 06. 2024

남편으로부터의 한밤의 탈주

체력이 국력이다

너무나도 익숙한 차 한 대가 들어왔다.

나는 몸을 최대한 눕히고 남편이랑 상간녀가 현관으로 들어오길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은 너무 조용하고 풀벌레 우는 소리만 찌르르 찌르르했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내 심장 소리가 밖으로 들릴 것처럼.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거 같은데 아직 주차장에서 올라오지 않고, 남편 차를 뒤쫓았던 언니에게서도 연락이 없다.

'무슨 일이지?' 걱정이 들 무렵, 언니가 카톡을 했다


언니 : 야! 저 xx 지금 내렸어. 여기 지하 3층이고 이 씨.. 이 xx 혼자 왔어. 나 지금 안 들키려고 차들 사이로 기어 다니는 중이야.


욕을 안 하신다던 분이.. 참고로 우리 언니는 굉장히 재능이 많고 능력 있는.. 음... 평소에는 교양이 넘치는 커리어 우먼이다. 근데 오늘은 입만 열면 욕이다. 나도 안다. 언니도 죽을힘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


혼자 돌아오다니.. 이때까지의 기다림이 물거품이 되나 싶었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블랙박스가 있다. 얼른 언니에게 메모리카드를 빼오라고 했다. 여기서부터 진짜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상황이 생긴다.

언니와 나의 생각은 이러했다.

남편이 1층 현관에서 집까지 올라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어림잡아 1분 이내였다. 우리 집은 7층이었으므로.. 만약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내가 와서 집을 들쑤셔놓고 갔고 본인의 차키를 탈취했음을.


그럼 바로 우리를 저지하기 위해,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를 살리기 위해 필사의 질주로 우리를 쫓아내려 올 것이다. 아마 엘리베이터를 타지도 않고 성큼성큼 뛰어내려오겠지? 그리고 지하주차장으로 달려 내려올 것이다. 그럼 우리는 계단을 이용하면 안 된다.

 언니에게 메모리카드를 챙겨서 차가 들어오는 곳으로 거꾸로 올라오라고 했다. 마주치면 누구 하나는 죽는다.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남편은 경호학과- 육군3사관학교 경력에 키는 180cm가 넘었다. 건장하고 힘이 센 남성이다. 태권도, 유도 등등 각종 무술에도 능했다. 빌어먹을 내 이상형이 지금 날 죽일 수도 있다.

 

 남편은 남자 중에서도 힘이 센 편이었고, 나는 여자 중에서도 마르고 힘이 약한 편이었다. 참고로 나의 주력은 고등학교 때 마지막으로 확인한 게 50m 11초였다. 우사인 볼트가 걷는 게 내가 목숨 걸고 뛰는 것보다 빠르다. 그리고 이미 언니와 나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심적으로 더더욱) 정말 힘이 한 개도 남아있지 않았다.


드디어 내가 앉아있었던, 아니 거의 누워있었던 돌계단 밑으로 남편이 보인다.

하이 오랜만!

그 새벽에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무슨 해외직구 판매자와 연락을 하는 거 같았는데 새벽시간이라는 게 문득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멍청한 남편은 전화를 하느라 내가 살금살금 돌계단을 내려가면서 자기를 찍고 있는 걸 전혀 몰랐다. 상간녀도 없는데 내가 왜 찍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군인, 아 그래 전직군인인데 바람을 피우는 자에게 *사주경계는 필수다 이 멍청한 놈아. 이제 남편은 공동현관문을 열었고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진짜 1분 안에 뛰어 내려오겠지. 언니는 블랙박스 메모리는 찾았을까? 나는 심장이라는 기관이 목에도 붙어있을 수 있는 걸 그날 알았다.


*사주경계 : 사방을 두루 경계하는 일.


근데 갑자기 오지 말아야 할 전화가 왔다.


언니였다.

블랙박스 메모리카드가 안 빠진다고 했다.

!?!?!!!!!!!!!... 오. 마이. 갓. 와 씨… 우린 죽었다 이제.

일단 말로는 어떻게 빼야 하는지 설명을 하면서 몸은 자동으로 지하주차장으로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었다. 어디로 내려갔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어쨌든 언니를 만나고 정말 다행히 내가 얼른 메모리카드를 단숨에 뺐다. 이제는 정말 마주칠 수도 있다. 언니와 나는 최대한 조용하고 빠르게 자동차가 내려오는 길로 뛰어 올라갔다. 나의 바람은 내가 정말 빨리 뛰어서 얼른 1층에 있는 우리 차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는 것이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 힘들었다. 마치 돌덩이를 다리에 묶은 채로 물속에서 뛰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너무 숨이 차고 토할 거 같았다. 또 한 번의 헛구역질. 나는 그때 여기가 내 인생의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 고향에서는 못 죽는구나... 이제는 잡히든가 말든가 그냥 포기하고 싶었다. 사실 마음속으로 여기에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고(그만큼 마음의 병이 심했다), 지금 세 사람이 마주친다면 세 사람 중 두 사람이 흉기를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면 말리든 뭘 하든 간에 최소 한 명은 죽을 거 같았다. 그럼 그 희생자는 나여야 한다는 극단적인 생각이 막 들었다. 그 와중에 언니는 계속 나보고 빨리 오라고 했다. 나도 누구보다 그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근데 그녀도 뭐 거의 걷고 있었다. 이 xx는 왜 집에 일찍 일찍 안 들어와서 지하 3층에 차를 세우고 난리인가.

 체력은 국력이다. 난 그날을 겪으며 깨달은 게 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사는 게 아니라 체력이 있어야 살아남는다.'

운동을 하시라. 세상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스펙터클한 추격전이 이루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정말 정말 다행히도 우리가 지하 3층에서 올라오는 동안에 남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너무 무서웠다. 연애할 때부터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화가 난 남편을 본 적이 없었다. 우리가 원래 싸우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이 사람이 흥분했을 때를 모르기 때문에... 원래 보이지 않는 공포가 더 우리를 무섭게 한다. 계속 뒤에서 나를 덮칠 것 같았고 나는 다시 칼을 꽉 쥔 채로 거의 기어가서 차에 탔다. 블랙박스 메모리를 유혈사태 없이 가져왔다는 기쁨과 안도의 환호성을 거의 몸을 반쯤 접은 채로(너무 힘들어서) 질렀다. 패트와 매트가 한 건 해냈다. 이제 집에 좀 가자. 제발.

 

블랙박스를 안 지웠어야 할 텐데. 오늘은 안 지웠겠지? 내가 없을 줄 알았을 테니까. 긴장이 풀리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언니에게 만약 걔가 차를 지상에 세웠으면 어땠을까?라고 묻자 운전을 하던 언니는 은은하게 돌아있는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며 조용히 얘기했다.

"차로 쳐버려서 트렁크에 넣어야지. "

응?!?!? 음… 그냥 조용히 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이제 새벽 한 시가 넘었다. 집에 가는 중에 카톡이 온다.

남편이었다.


지독한 회피형 인간과의 대화.


남편 : 집에 왔었네?

나 : 어

남편 : 말이라도 하고 오지

나 : 내가 왜? 내 집인데?

남편 : 그래 그건 그렇다.

나 : 난 남의 집인 줄 알았어. 모르는 옷들이 잔뜩 있길래.

남편 : 짐은 다 챙긴 거야? 칫솔은 왜 가져갔어? 칼도 없네?

나 : 아니 내 칫솔꽂이에 이상한 칫솔이 있어서 버렸고, 칼은 쓸 데가 있었어. 왜 뭐 불만 있어?

남편 : 아니. 그냥 물어본 거야. 칼 가져갈 거면 세트 다 가져가지.


대화의 끝이었다. 이런 회피형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할까?


집에 돌아오고 나는 얼른 메모리카드를 샅샅이 뒤져 상간녀의 얼굴과 집을 알아냈다. 놀라울 정도로 남편과 닮았다. 상간녀가. 아니 정확히는 시모와 닮았다.  

그리고 매일같이 아침에 상간녀를 모시러 가서 출근하는 남편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유의미한 것은 이것들이 근무 시간에 맘대로 차를 끌고 나와 쇼핑을 하러 간 것이었다. 아침에 출근할 때 위병소를 지나서 사무실 건물 앞에다 차를 주차하고 시간차를 두고 내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다시 부대를 빠져나온다. 그리고 갑자기 어느 쇼핑몰의 지하주차장. 두 년놈이 내려서 다정하게 걸어간다. 오호 무단이탈 저장!


아쉽게도 음성 녹음은 되어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꽤 쓸만한 정보들을 얻고 나는 그날 거의 새벽 다섯 시가 넘어 눈이라는 것을 그냥 감아버렸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숨 막히는 내용을 정리해 보면, 난 아직도 상간녀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모른다. 지겨우신 거 안다. 자잘한 증거는 있지만 결정적 증거가 없기에 소송을 걸 수 없다. 또 한 번 날려야 한다. 뻥카.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남편에게서 메모리카드와 차키를 언제 줄 거냐는 카톡이 와 있었다. 이제 알았나 보다. 진짜 내가 내 남편을 너무 똑똑하게 봤다. 나의 전날의 필사의 탈주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너의 알 바가 아니라고 메모리카드 하나 새로 사라고 했다. 차키는 하나로도 충분하다고. 그리고 날렸다 마지막 뻥카.


"그 여자애한테 전해. 내가 부대로 출발하기 전에 지금 당장 나한테 전화하라고."


말해놓고 설마 30살이 넘은 상간녀가 바보가 아닌 이상 나한테 전화를 할까 싶었다. 이번 뻥카는 망했다는 느낌이

들던 바로 그때,


핸드폰 진동이 울린다. 모르는 번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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