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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iposa Aug 09. 2024

상간녀에게 온 전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바람도 똑똑해야 피우는 것이다.

누가 봐도 나의 마지막 뻥카에 속아 넘어간 상간녀의 전화였다.

그래도 번호는 자기 번호는 아니겠지? 일단 받자.


나 : 여보세요

상간녀 : 저예요

나 : 넌 줄 알아. 할 말 있으면 해 봐

상간녀 : 일단, 죄송합니다

나 : 뭐가 죄송해?

상간녀 : 결혼을 하셨는데, 제가 만나서 죄송합니다

나 : 네가 누구를 만났는데? 문장에 목적어가 없잖아

상간녀 : 음.. 제가 ooo 주무관님을 만나서 죄송합니다

나 : 응. 그리고?

상간녀 : 곧 헤어지실 거라고 해서 만났고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나 : 응. 난 헤어지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 그럼 넌 유부남인걸 알고 만난 거네?

상간녀 : 네

나 : 너 집에 돈이 좀 있나 보구나?

상간녀 : 아니오

나 : 근데 내 집에 들어왔네? 거기가 어디라고 네가 들어와? 너네 집이니?

상간녀 :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나 : 언제부터 만났니?

상간녀 : 잘… 모르겠습니다

나 : 모르겠어? 왜? 만나는 남자가 그렇게 많니?

상간녀 : 아닙니다. 진짜 기억이 잘 안 납니다

나 : 성병은 다 나았니? 이 남자 저 남자 유부남 할 거 없이 막 만나고 다니니까 그렇지. 언제부터 내 남편하고 만났는지 기억나는 대로 나한테 연락해

상간녀 : 네

나 : 아, 그리고 너네 부모님은 아시니? 네가 이러고 다니는 거

상간녀 : 모르십니다


상간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걔도 제정신인 거 같지는 않았다. 내 알 바가 아니다.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전화를 끊고 심호흡을 한 후, 설마 이 돌대가리가 진짜 자기 전화번호로 전화했을까 싶어서 카톡 친구추가를 눌러보았다.


잭팟이다!!!!!!!!!!!!!!!!!!!!!!!!!!!!!!!!!!!!!!


본인 프로필 사진, 실명까지 다 공개되어 있었다.

우와.......... 얘 진짜........ 멍청하구나.....ㅎ 나는 참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이렇게 멍청한 사람들이 나랏일을 한다는 것에 굉장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도대체 나의 조국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가.


아무런 죄를 짓고 살지 않는 나 같은 사람도 카톡을 별명으로 해놓는다. 그래서 마지막 의심으로 상간녀에게 송금하기를 눌러보았다. 실명 그대로였다. 역시가 역시였다. 내가 머리를 쓰는 그 에너지가 아까워 눈물이 난다.


이제 남은 건 뭐? 고소장 접수.  아, 근데 내가 이 년놈들이 숙박업소에 들어간 것을 찍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증거보전신청'이라는 게 있었다. 숙박업소나 아파트 관리소에 문의를 하여 증거보전신청서를 내면 해당 시간대의 엘리베이터나 현관 CCTV 영상을 보여줘야 하는 아주 좋은 제도였다. 보통의 영상기록 보관 기간은 2주에서 길어야 한 달이고 법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시간이 꽤 걸리는 일이기 때문에 삭제되기 전에 얼른 먼저 확보하라는 제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일단 법원에 인터넷으로 블랙박스 영상과 몇몇 사진과 통화녹취록을 증거로 보내놓은 후 허가를 기다리면서 변호사를 선임해야 했다. 인터넷으로 열심히 뒤져보았다. 여러 사무실과 통화를 해보고 만남도 가져봤는데 그중에서도 군법을 잘 아는 군검사 출신의 변호사가 눈에 들어왔다. 일단 이틀 뒤에 만나보기로 했다. 내 인생에 변호사를 만날 일이 있다니.. 살고 볼 일이다.

 다행히도 바로 다음 날 증거보전신청허가가 나왔고, 나는 그걸 프린트해서 내가 살던 그 거지 같은 집으로 다시 갔다.


 관리사무소장님에게 그걸 보여줬더니 CCTV를 절대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응? 이게 뭔 말이지?

나에게 그걸 왜 봐야 하냐고 물었다. 아는 사람을 확인하고 싶다고 애써 에둘러 말했다. 그런데 그 아저씨, 얼마 전에 다른 아파트에서 같은 사정으로 CCTV를 보여줬다가 역으로 큰일을 당했다고 한다. 초상권 침해, 사생활 침해 어쩌고. 암튼 자기는 절대 안 해준다고 큰소리를 냈고, 나도 덩달아 언성이 높아졌다. 난 내가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사람에게 언성을 높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아니 법원에서 보여주라고 허락했는데 왜 아저씨가 안된다고 하는지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다.


관리사무소장 : 아가씨가 아무리 여기에서 버티고 있어도 난 못 해줘요 그거. 난 몰라.

*잠깐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아저씨가 나를 아가씨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 그 와중에 그건 들렸다.


나 : 아니 그럼 어떡해요. 제가 가질 수 있는 증거는 이거밖에 없는 데에!!!!!!!!!!!!!

관리사무소장 : 몰라요 나는. 안 된다고 했고. 나가요 이제.


그 말을 듣자마자 참아왔던 서러움이 폭발했다. 그리고 내가 바닥에 주저앉아 울며 말했다.

"남편이 바람을 폈다고요! 그리고 그 여자랑 들어간 영상이 아저씨한테 있잖아요 엉엉. 저는 이거밖에 없어요. 이거 없으면 소송도 못한다고요 엉엉" 너무 서러웠다.

그러자 한 아주머니께서 같이 주저앉아 나를 안으며 다 안다고 왜 왔는지 다 알고 있으니 그만 울라고 본인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관리소장님에게 그냥 보여줄 수 없냐고 물었고 그 대머리 아저씨는 재차 거절했다. 나 참 가지가지 하면서 살았다. 그러더니 직원 아주머니께서 나에게 물을 한잔 주시고는 관리사무소 안에 있는 무슨 방으로 들어가서 잠깐 진정하고 있으라 하셨다. 그리고 뭔가 소장님을 설득해 주시는 거 같았다. 왜냐면 내가 물을 마시다가 너무 화가 나서 다시 문을 벌컥 열고 나갔을 때, 소장님 옆에 계시던 그분이 얼른 달려와 나를 보고 눈을 찡긋하며 후다닥 문을 닫으셨기 때문이다. 나 갇힌 건가? 그래도 정말 고마운 분이다.


 반감금 상태로 물을 마시며 생각을 정리하는데(사실은 화를 가라앉히는데)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바로 내일 내가 만나기로 한 변호사님.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를 걸었다. 젠틀하게 받은 변호사님은 자초지종을 듣고는 관리소장님을 바꿔달라고 하셨다. 관리소장님께 내 변호사라며(아직 수임도 하지 않은 상태, 입만 열면 거짓말) 전화기를 건네니 진짜 못마땅한 눈으로 날 흘겨보았다. 질 수 없지. 나도 째려봤다. 다시 생각해도 열받는다. 나에게는 노발대발하던 그 아저씨는 온 데 간데없고 네네만 일관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마지막 자존심이 있는지 돌려보는 거 까지 내가 보면 안 된다고, 다른 사람을 절대 보면 안 된다고 나보고 집에 가 있으라고 했다.

예예 그럽죠. 내가 다른 사람들 엘리베이터 탄 모습이 왜 궁금하겠습니까. 흥! 사람이 권력 앞에서 꼼짝 못 하는 게 참 비참하고도 신기했다. 내가 주저앉아 울 때는 본 체도 안 하더니.. 못된 대머리 흑흑.


나는 집으로 쫓겨가는 와중에 변호사님께 다시 전화를 걸어 갑자기 연락드려 죄송하다고 했고 너무 급했다고 했다. 변호사님은 잘 전화하셨다고 당연히 해주어야 하는 일인데 아마 소장님이 잘 모르신 것 같다는. 아주 교양 있고 학식 있는 말을 하셨다.

그렇게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내 사연을 다 말하고 대성통곡을 하고 집에 올라가 잠시 쉬려다가 이제는 습관적으로 남편의 다른 가방을 뒤져보았다. 찾았다 둘의 인생 네 컷.


 손으로 불빛까지 가려가며 보기 좋게 예쁘게 내 핸드폰으로 담아뒀다. 날짜를 보니 내 생일 며칠 후였다. 나는 말라죽어가고 있었는데 둘은 행복하게 20대 마냥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더 가관인 거 하나, 남편이 사진 속에서 입고 있던 정장은 우리 결혼식 피로연 복장이었다. 이 xx는 정신병자다. 아, 그리고 둘이 커플링도 맞췄다. 아, 우리나라가 일부다처제였구나.

 

다음 날 변호사님과 나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만났고, 그 전날의 죄송함+고마움+변호사님의 박학다식함을 보고 초스피드로 수임을 완료했다. 아 그리고 우리 집 성보라가 ‘뻥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말은 제에발 변호사님 앞에서 쓰지 말라고 하도 난리를 쳐서 나는 ‘블러핑(bluffing)’이라는 같은 뜻 다른 느낌의 단어를 사용했다. 근데 어감 상 뻥카는 뻥카여야 한다. 아무튼 변호사님은 원고가 이렇게만 합법적으로 증거를 완벽하게 가져오면 변호사들이 할 일이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하셨다.


"앞으로 잘해봅시다"


이제 시작이다. 상간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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