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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iposa Aug 02. 2024

남편과 상간녀를 기다리는 중 입니다

칼을 꼭 쥐고 너희를 기다려

 언니와 나는 처음엔 같이 기다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동의 입구 바로 옆에 정자로 이어지는 돌계단이 있었는데, 거기 맨 위로 올라갔다. 우리는 계속 아래위로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며 서로가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어떤 자세로 앉아 있어야 안 보이는지 확인했다. 어느덧 저녁 6시가 넘었다. 날은 깜깜했고 점점 추워지기 시작했다. 언니는 나에게 우리 둘이 떨어져 있을 것을 제안했다. 저번 글에서 말한 대로 나는 1층에서 두 년놈이 현관으로 들어가는 것을 동영상으로 찍기로 했고, 언니는 남편이 주차를 하고 사라짐과 동시에 차 문을 열고 블랙박스 메모리를 들고 우리 차로 뛰는 것으로 했다. 시뮬레이션을 몇 번이나 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계속되었다. 나는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아파트 라인 안으로 들어가서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센서등이 켜질까봐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게 바로 현대판 망부석이구나. 보통의 사람들은 핸드폰을 보느라 내가 있다는 것을 몰랐지만 몇몇 사람들은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웬 미친 여자가 가을에 패딩을 입고 계단에 앉아 있으니 나였어도 기절했을 것이다.

 언니와 나는 서로의 핸드폰 배터리를 아끼면서 중요한 대화만 나눴다. 그러다 나는 더 이상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없어서(지금 생각해도 너무 죄송하다) 우리 집인 7층으로 올라갔고, 7.5층에서 그들을 다시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바로 찍고 튈 생각이었다.

 점점 체력은 고갈되어 갔고 어느덧 시간은 밤 10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문득 얘네가 오늘 안에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2시까지만 기다려보기로 했다.

초긴장 상태의 기다림... 패딩주머니에 있는 과도를 하도 만지작만지작 거려서 감아놨던 휴지는 이미 너덜거렸고, 내 마음이 차가워질수록 그 칼은 따듯해졌다. 더 이상 내 주머니에 있는 칼이 무섭지 않았고 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칼날의 끝이 나를 향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지만 가족들을 생각하면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그냥 한없이 외롭고 서러웠다.


 또 다른 복병이 있었다. 바로 '화장실'. 긴장도 긴장이고 원래 화장실을 자주 가는 나는 중간중간 자꾸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언니에게 카톡으로 보고를 했다.


나 : 나 화장실 갔다 올게.

언니 : 야 이 씨. 그만 좀 왔다 갔다 거려!!

나 : 아니 근데 급한 걸 어떡해.

언니 : 그러면 불을 켜지 말고 들어가. 네가 불을 켜면 혹시 걔네가 바깥에서 집 한번 봤다가 불 켜져 있으면 눈치챌 거 아니야 이 멍청아(동생이 지금 세상 불쌍한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이 상황에서도 언니는 나에게 욕을 한다. 혈육이다).

나 : 아, 그러네. 알겠어 오키(근데 보통 욕을 먹으면 정신을 차린다).


이렇게 나는 내 집 화장실에 들어가면서 거실 불도 못 켜는 여자가 되었다. 깜깜한 밤에 혼자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집으로 들어가서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는 찰나, 중요한 전화가 왔다. 그 작은 진동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죄지은 게 아닌데.. 일단 기운이 너무 없으니 좀 앉자. 전화를 받은 상태로 깜깜한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전화를 끊고 나오려는데 침대 머리맡에 아까 보지 못했던 뭔가가 보였다.

'이게 뭐지?'

플래시로 비춰보았다. 아주 작은 무언가가 작게 접혀서 색이 화려한 비닐(?)에 들어있었다. 펴보자!


..?!?!?!?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건 바로 작은 부적이었다.


여러분은 혹시 깜깜한 밤에 혼자 집에서 플래시를 들고 돌아다니다가 부적을 본 적이 있는지.. 난 참으로 궁금하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부적이라는 것을 처음 봤는데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보았다. 그리고 그 부적 맨 끝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O베개'. ‘O’은 내 성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시모가 전달해 준 이혼을 사주하는 부적이었고, 내 베갯속에 넣어놓으라고 했단다. 진짜 염병도 가지가지로 떤다. 일단 부적의 정체를 몰랐기에 사진만 찍어두고 다시 내려놓고 도망치듯이 아니고 진짜 도망 나왔다. 방울소리가 들리는 거 같았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귀신의 집’이었달까.


 어느덧 밤 11시. 너무너무 춥고 배도 고팠던 우리는 작전을 바꿨다. 일단 차로 돌아가자. 차에 탄 우리는 아파트 정문이 보이는 관리사무소 앞에 차를 대고 시동을 껐다. 워낙 남의 차량번호를 습관적으로 외우고 다니는 남편의 특성을 알아서 우리 차를 단번에 알아볼 거라고 생각했다. 경비 아저씨가 여러 번 지나갈 때마다 우리는 최대한 몸을 뒤로 젖혀서 순찰을 피했다. 몸에 진이 다 빠졌다. 기진맥진은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우리는 점심식사 이후로 먹은 것이라고는 청심원 한 병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안 먹겠다고 하니 우리 집 성보라가 “먹어!!!! 먹어야 기운이 날 거 아니야!!!!! 그래야 저 xx들 잡을 거 아니야!!! 먹어! 먹으라고!!!!!!”

뭐라고 더 소리를 지르는 거 같았는데 여기까지만 듣고 얼른 내린 나는 편의점에 가서 삼각김밥과 물을 사 왔다. 이게 어디로 넘어가는지도 모르게 그냥 입이라는 곳으로 욱여넣었다.


 밤 12시. 우리가 기약한 시간이 되었다. 이대로 포기할 것인가? 그때 나에게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남편에게 전화를 하자!'

전화를 해서 내가 사정이 있어 내일 새벽 일찍 집에 들러 짐을 챙겨갈 거라고 말할 예정이었다. 그럼 집안을 그 꼴로 만들어놓고 나간 년놈들은 지금 어디에 있더라도 돌아와서 집을 정리할 수밖에 없을 노릇이었다. 이 생각을 지금 하다니..! 언니는 내가 오랜만에 생각이라는 걸 했다며 매우 기특해했다. 마치 패트와 매트처럼.

아이폰은 전화녹음이 되지 않는 관계로(녹음이 습관이 되었다) 녹음 어플을 받아 시험 삼아 언니에게 전화를 해봤다.


나 : 아, 아, 이거 녹음 잘 되나? 텍스트 전환 잘 ㄷ

언니 : 야야야야야! 저 차 아니야?????????????


딩동댕. 거짓말처럼 우리 눈앞에 남편의 차가 아파트에 들어서고 있었다. 오전 12시 10분. 이제부터는 1분 1초가 급하다. 마음이 급한 나는 일단 차에서 내려서 죽을힘을 다해 우리 동 앞으로 뛰었고(여전한 헛구역질.. 꾸엑) 언니는 그 차를 거리를 두며 따라가서 지하주차장 쪽으로 갔다.


뛰면서 "오 주님.. 제발요 제발요."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뭐가 제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내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왔다. 신앙심은 깊다. 네가 먼저 부적을 썼으니 이건 이제 종교의 전쟁이었다. 숨이 턱끝까지 차다 못해 폐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거 같았지만 일단 나는 다시 그 돌계단 위로 올라가서 거의 돌바닥에 누워있었다. 등이 차가웠다. 다시 하얀 피가 차갑게 파도를 치고 있었다.


이제 남편이 차에서 내리면 된다. 과연 상간녀와 같이 내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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