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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iposa Aug 30. 2024

결혼생활을 마치며

그게 사랑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안녕하세요.

 지금까지 브런치라는 아주 비밀스럽게 공개된 세계에서 저의 짧고도 강렬한 결혼 생활이야기를 나눠보았는데 어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다지 유쾌하거나 좋은 소식은 아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글을 연재하면서 힘들었던 과거를 돌아보는 것에 대한 걱정도 있었지만, 막상 쓰고 나니 진짜 완전히 털어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참 하길 잘했다!'입니다.

사랑도 이별도 그리고 브런치도.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이런 남자와 결혼하라고.


그럼 먼저, 제 남편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그는 예의가 참 바르고 성실했습니다.

술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고, 담배는 손대는 것조차 싫어했습니다.

남중-남고-체대-3사관학교를 거쳐오며 여사친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일전에 한번 얘기했듯 4년이라는 연애기간 동안, 그리고 이어진 결혼생활에서도 항상 전화는 스피커폰으로 받았습니다.

단 한 번도 이성 문제로 속을 썩인 적이 없습니다.

단 한 번도 연락 문제로 속을 썩인 적이 없습니다.

연애기간 내내 당직사령을 맡을 때면 새벽에 중간중간 본인이 어떤 업무를 왜 하고 있는지, 시시콜콜한 대답 없는 카톡을 보내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교대가 끝나면 '현 상황 보고'라는 제목으로 진짜 군인들이 보고하듯이 장문의 카톡을 보내놓고 "이상 무!"라는 말과 함께 이제 잠을 자려한다고 보냈습니다. 그럼 저는 아침에 눈을 떠서 오늘 하루도 나라를 지키느라 고생한 남자친구가 참 안쓰럽고 멋있었습니다.

 실제로 그 당시에 ‘태양의 후예’라는 드라마로 전국에 그야말로 ‘유대위 열풍’이 불었습니다. 저는 가까이에서 군대를 보며 드라마와 현실은 너무나도 다른 걸 알았지만, 그래도 참 남자친구가 멋진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 실제로 그가 송중기 배우를 닮은 건 절~~~대 아닙니다. 제가 송혜교 배우가 아니듯이.

저의 일이라면 그 먼 강원도에서 밤을 새우고라도 차를 몰고 달려와 해결해 주었고, 제 고민을 들어주었습니다.

귀엽게 말하면 비글미, 나쁘게 말하면 성인 ADHD라 조심성이 정말 없어서 늘 여기저기 다치고 위험한 행동만 골라서 하는 저를 늘 불안해하며 챙겨줬습니다.

제가 매운 걸 먹겠다고 하면 본인은 좋아하지도 않는 맵지 않은 음식을 시켰습니다.

그러다 제가 매워하면 너는 위가 약하니 이런 걸 먹으면 안 된다며 아무런 불평 없이 바꿔주었습니다.

날이 추우면 핫팩을 양쪽 패딩 주머니에 넣어놨다가 제 핫팩이 차가워지면 바꿔주고 또 바꿔주고를 반복했습니다.

친구들에게 스스럼없이 저를 소개했고 저를 너무나도 아껴주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여행을 갔을 때, 같은 그룹에 있었던 나이 많고 점잖은 아저씨께서 여행 마지막 날 저녁에 술을 한잔 걸치시고는 저를 불러 얘기하셨습니다. 참 결혼 잘했다고. 남편은 진국이라고. 와이프는 활발하고 밝은 성격인데, 남편이 그 중심을 잘 잡아주는 듬직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남자 어른이 보기에도 그랬습니다. 이런 말을 한 두 명에게 들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화관에 가면 저보다 더 많이 울었습니다. 겉으론 강해도 속은 여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과 결혼을 해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저에게 가장 큰 배신과 상처를 주었습니다. 본인의 큰 잘못을 숨기기 위해 저의 약점을 무기로 삼아 휘둘렀고 저는 그만 아물 수 없는 상처를 입고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몸무게는 10킬로 가까이 빠졌고 마음의 병은 덤으로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남자를, 아니 사람을 보는 눈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저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저는 몸은 약하지만 마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남편과는 정말 다른 삶을 살았고 자유분방한 나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적당히 일하고 적당한 수준에 맞춰 여행을 가는 것. 그게 저의 삶의 이유이자 행복이었습니다.

제가 하는 일에 늘 자부심을 가지고 그 일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든 아니든 상관없었습니다.

 꿈이라는 아름다운 것이 특정 직업으로 굳어져버린 한국 사회에서 저는, 늘 직업은 내 꿈을 이뤄주는 수단이라고 말했습니다. 저에게 여행이라는 꿈을 이룰 수 있는 자금을 만들어주는 것이 직업이었고, 그래서 그 일을 정말 사랑했고 열정적으로 했습니다.

 여행과 사람을 좋아하고 언어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저는 지금까지도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사가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네’입니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가사입니다.

 여행 중 정말 다양한 친구들을 만났지만, 유럽의 한 게스트하우스 루프탑에서 아름다운 야경을 배경삼아 아프리카 기니와 마다가스카르에서 온 친구들과 기타 치고 춤추고 노래하는 추억을 만들었다면(제가 마룬5의 노래를 열창했더랬습니다) 정말 온 세상 어린이들을 다 만나는 삶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 저에게 언어공부는 숙제가 아닌 저의 꿈에 날개를 달아주는 하나의 좋은 취미였습니다. 그렇게 사는 저의 삶은 정말이지 다채로웠습니다.


‘언제나 밝고 명랑한 사람 그리고 정의로운 사람’ 사람들이 저를 말해주는 수식어였습니다.

 이왕 해야 하는 거 일하는 것도 열심히, 노는 건 더 열심히. 주어진 모든 상황에서 기어이 행복을 찾고야 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저는 괜찮았습니다. 딱 하루 방 안에 틀어박혀 울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루가 지나고 나와서 가장 먼저 한 말이 "배고파."였습니다. 정신이 나갔음을 직감한 엄마가 괜찮냐고 되묻자 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제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운다고 바뀌는 거 아니잖아. 어쩔 수 없지 뭐. 나 치킨 먹고 싶어."

 저는 그 와중에도 행복을 찾아냈습니다. 아이가 없으니 더 많이 일하고 더더 자유롭게 여행하는 행복이 주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강아지를 유난히 예뻐하니 평생 유기견들과 가족처럼 살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물론 결혼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다 남자친구가 괜찮다고 해줬을 때, 사실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 우리는 3년의 연애를 더 했고 끊임없이 정말 괜찮겠냐고 물어보는 저에게, 자기는 정말 괜찮다고 너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걸 믿은 것이 잘못이라면, 그건 저의 잘못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남편은 결혼을 하고 저를 가끔 '정신적 지주'라고 불렀습니다.

남편은 장남으로, 유년기에 경제적으로 참 고생을 많이 하며 어렵게 스스로 돈을 잘 모아 왔습니다.

오히려 부모가 자식에게 금전적인 부분을 바라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가족과의 관계가 서먹서먹했습니다.

 저는 직업적으로도 긴장감이 감도는 삶을 살던, 그래서 잘 웃지 않았던 그런 남편이 안쓰러웠고, 저와 결혼을 하면 진짜 재밌는 가정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슬퍼서 흘린 눈물보다 웃다가 흘린 눈물이 더 많았던 저는 남편에게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찾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여행하는 것이 얼마나 짜릿하고 신비로운 일인지 죽을 때까지 손잡고 함께 해보자고 했습니다.


 내성적인 남편은 여행지의 배에서 음악에 맞춰 먼저 일어난 저와 함께, 제가 내민 손을 잡고 사람들 앞에서 신나게 춤을 췄습니다.

처음 보는 남편의 모습에 행복했습니다.

 가끔 바깥에서 멘털이 깨져 들어온 남편에게 저는,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으면 꼭 나한테 다 털어놓으라고 끙끙거리지 말라고,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이 없겠지만 오빠를 웃게 해 줄 수는 있다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춰줬습니다. 그럼 남편이 웃었습니다. 저는 그게 좋았습니다. 남편이랑 바닥을 구르며 배가 찢어지게 웃는 게 좋았습니다.


 흥이 넘쳐서 주체를 못 하는, 음악만 나오면 냅다 일어나서 춤부터 추는 흥부자 ‘흥oo’.  

’oo’은 제 이름입니다. 그런 별명도 있었던 저를 남편은 신기해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남편은 종종 저에게

"넌 매사에 긍정적이고 잘 웃고 너의 일을 사랑해."

"난 항상 밝고 당당한, 그런 네가 너무 좋아."

"장난치려고 궁리하는 눈빛이 사랑스러워."

"항상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는 모습이 정말 예뻐."

"힘들다가도 너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안심이 돼."

"너와 함께면 별 거 아닌 일인데도 참 행복해."

"난 너 죽으면 심심해서 죽을 거야 아마. 심심사."

라고 했습니다.


저는 종종 남편에게

"오빠는 내가 못하는 운동을 잘해서 멋있어."

"운전도 잘하는데 길도 잘 찾는 게 너무 대단해."

"항상 내 의견을 먼저 물어봐줘서 고마워."

"듬직하게 내 옆에 있어줘서 좋아. 무료경호서비스!"

"내가 맨날 까부는데 다 받아줘서 고마워."

"나도 오빠와 함께라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해도 행복할거야."

"난 오빠 죽으면 꼭 더 살아서 나랑 살아볼 수 있는 영광을 한 남자에게 더 줄 거야."

라고 했습니다.


 까불지 못하면 죽는 병에 걸린 제가 가끔, 아니 자주 거실 티비 앞에서 몸을 흔들면 남편은 몇 번이고 고민하다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근본 없는 춤을 추곤 했습니다. 저만 볼 수 있는 남편의 모습이었습니다. 흥으로는 질 수 없는 제가 소파 위로 올라가서 벽을 잡고 난리부르스를 쳐야 남편은 제가 또 떨어지거나 다칠까 봐 ‘상황종료’를 외치고 우리는 원래 위치로 돌아갔습니다.


 남편이 나오길 기다리며 화장실 앞에 숨어 있으면 엄청 크게 놀란 남편은 저를 잡으러 막 뛰어왔습니다. 도망쳐봐야 결국 잡힐 거면서, 그리고 더한 보복을 당할 거면서도 숨이 넘어가게 재밌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비글미가 넘치는 저는 태권도 유단자인, 가만히 서있는 남편을 상대로 혼자 발차기를 하다가 햄스트링이 나간 적도 있습니다.

 남편이 양치를 하러 들어가면 괜히 따라 들어가서 장난의 시동을 겁니다. 그러면 서로 물 뱉기 싸움이 일어납니다. 옷이 다 젖어야 끝나는 아무도 시키지 않은 바보들의 게임. 그러나 그게 너무 재미있었고, 바보들은 늦은 시간이라 층간소음이 걱정되어 서로의 입을 틀어막곤 했습니다.

 게임을 좋아하는 남편은 퇴근을 하고 저녁을 먹으면 딱 한 시간만 게임을 한다고 했고 그 약속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약속한 시간이 되면 제가 있는 거실로 나와 같이 티비도 보고 하루에 있었던 일을 나누곤 했습니다. 남편의 취미생활에 함께 하고 싶어서 저는 평생 좋아하지 않았던, 아니 무서워서 싫어했던 전쟁물을 함께 섭렵하기 시작했습니다. 본인의 분야라서 신이 난 남편이 각종 무기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면 저는 그걸 너무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덕분에 혼자가 된 지금까지도 전쟁영화 덕후로 남아있습니다. 이제는 살상무기가 나오지 않는 건 영화로 치지 않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도, 우리가 느끼기에도 참 행복한 부부였습니다.


 물론 저의 결혼 생활도 쉽지만은 않았고 힘들다고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남편의 자존감이 너무 낮았고 스트레스에 취약했습니다. 직장에서의 문제도 회피하려고만 하는 모습이 답답했습니다. 저의 힘듦은 입밖에도 꺼낼 수 없었습니다. 남편이 군무원마저 그만두고 싶다고 했을 때는 정말 저도 다 놓고 잠시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힘들어하는 남편을 두고 제가 떠나면 남편이 무너질 것 같았고, 남편이 힘들 때 옆을 묵묵히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천성이 진지하지는 못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말씀드린 대로 철 모르는 아이처럼 남편을 웃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혼자 있을 때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본인의 일을 열정적으로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런 사람이랑 결혼을 했으면 어땠을까’ 또는 ‘결혼을 아예 안 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저도 너무 지쳤었으니까요. 그러나 또 스트레스를 잔뜩 받고 집에 돌아온 남편이 저한테 만큼은 한없이 다정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던 스스로가 너무 미웠습니다.

 당연히 저에게도 셀 수 없이 많은 단점이 있었을 것이고 남편도 아마 죽을힘을 다해 그걸 참아내고 맞춰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혼'이라는 단어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결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지켜봐 주기 위해 모인 사람들과의 약속을, 그 성스러운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고 그 무엇보다도 제가 믿는 하나님의 앞에서 서약한 우리의 결혼생활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이겨내야 한다고, 힘들 때마다 그 약속을 떠올렸습니다. 결혼은 'wedding ring(결혼반지)' 다음이 'suffering(고통)'이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원래 결혼은 그런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둘이 하나가 되는 건 매우 힘든 일이라는 것을.


 나비였던 제가 어느샌가 쇠똥구리가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저는 같은 똥을 굴리는 쇠똥구리 짝꿍이 있어서 좋았습니다. 재밌었고, 힘듦은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혹시 짝꿍 쇠똥구리가 힘들어서 똥을 버려버리면 저 혼자서 똥을 굴릴 수 있었습니다. 옆에서 응원만 해준다면, 아니 동행만 해준다면 땀을 뻘뻘 흘려도 괜찮았습니다.

 제가 남편을 평생 먹여 살려야 한다고 해도 정말 괜찮았습니다. 그만큼 저는 남편을 유일하게 제가 선택할 수 있었던 가족이라고 생각했고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짝꿍 쇠똥구리가 저의 손을 영영 놓아버렸습니다. 그냥 놓은 것이 아니라 가장 날카로운 칼로 베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상처가 벌어진 채, 피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저에게 각자의 길을 가자고 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저의 결혼생활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친정으로 돌아온 후, 언젠가 심리상담을 하다가 저의 결혼생활 이야기를 쭉 했습니다. 상담을 굉장히 오래 하신 나이가 많은 여자 상담사님께서 저에게 아주 충격적인 말을 하셨습니다.


"oo 씨가 한 결혼생활은 정상적이지 않아요. 보통 부부의 사랑이 아니에요 그건. 보통 남녀의 사랑이 아니라고요. 그건 마치 서로가 서로의 부모 역할을 해 준거나 마찬가지예요. oo 씨는 남편의 엄마 역할을, 남편은 oo 씨의 아빠 역할을 한 거예요. 그건 너무 이상한 관계예요. 어서 그 관계에서 벗어나세요."


머리가 띵 하고 울렸습니다.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제가 나열한 남편과 저의 마음, 행동이 부부간의 사랑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비정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사랑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저는 사랑을 아직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

.

.

그리고 이제는 더 알고 싶지 않다고도 말하겠습니다.




* 갑자기 너무 슬프고 아련한 글을 썼나요? 저는 이 이야기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반짝반짝 빛났던 저의 20대와 조금은 성숙해진 30대의 일부를 함께 나눈 사람과의 마지막이 제가 원했던 엔딩은 아니었지만 그 연애를, 그 결혼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적어보았습니다.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어떤 감정이나 미련 따위도 없습니다.


 얼마 전에 너무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제가 너무 좋아하는 구교환 배우가 유튜브에서 본인은 본인의 힘든 시절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충격으로 기억을 잃는 거 같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집 성보라랑 같이 보다가 성보라가 한마디 했습니다.

"야, 대박 너 같은 사람 또 있다. 네가 헛소리 한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그런 사람들이 있나 봐."

 제가 그랬습니다. 어릴 때부터 힘든 일을 겪고 나면 그 장면과 과정은 생생하게 남는데 그 고통과 그 감정이 잘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걸 배우님과는 다르게 ‘도마뱀이 살기 위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행위‘라고 표현했었습니다. 아무도 안 믿었습니다. 그럴 수는 없다고. 근데 무려 우리 구교환 배우님이 저랑 같은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다.

 제가 연재했던 이야기의 장면은 생생한데, 사실 그 슬프고 화났던 감정은 잊어버렸습니다. 살기 위한 본능이었나 봅니다. 제가 스스로 꼬리를 잘랐고 그 꼬리는 다시 곱게 자라고 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제가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원인 모를 꼬리뼈 통증에 시달렸는데… 꼬리를 잘라내서일까요?

아무 말 대잔치가 열리는 걸 보니 저는 진짜 예전 모습을 되찾고 있나 봅니다.


 남편과의 연애-결혼 과정에서의 좋은 기억만 마음 한편에 깊이 묻어두고 다시 나비가 되어보려 합니다. 저에게 가장 큰 사랑과 가장 큰 상처를 준 사람이지만, 그 상처는 도려내고 예쁘게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꽃 사이를 팔랑이는 나비 같던 저의 모습만 간직한 채 살아가겠습니다. 저를 너무 사랑하고 아껴줬던 남편의 모습이, 그 오랜 연애와 결혼생활에서의 모습이 다 거짓이었다면 저는 너무 슬퍼질 테니까요.



 얼마 전에 저의 사정을 모르시는 한 아주머니께서 저와 긴 대화를 나누시고는,

“아이고~ 아직 결혼 안 했죠? 그래서 그런지 참 밝고 구김살이 없는 아가씨네.”

라고 말하셨습니다. 틀려버리고만 강한 추측과 결혼에 대한 해학이 드러나있는… 아주 요상하고 재미있는 그리고 '아가씨'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기분 좋은 문장이었습니다. 대체 결혼이란 무엇일까요.


'구김살'...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이 일을 겪고 나서의 저의 마음은 마치 고구마를 감싼 채 장작불 속에 던져진 호일처럼, 상할 대로 상하고 구겨질 대로 구겨져서 영원히 펴지지 않을 것 같았는데 말입니다.


행복을 찾아 떠날, 앞으로 더 아름다워질 나비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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