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 및 각종 정신질환과 동행하는 인간의 삶
거식증에서 해방되는 날이 올까? 완치. 그것은 가능한 것일까? 1화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많은 수의 거식증 환자들은 발병 5년 안에 부분 관해와 완전관해를 경험한다. 부분 관해란 지난 3개월 동안 저체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체중 증가나 비만이 되는 것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을 느끼거나 (체중 증가를 막기 위한 행동을 보일 수도 있다.) 혹은 체중과 체형에 대한 자기 지각에 장애가 지속되는 경우이다. 완전 관해란 자발적으로 유도한 저체중이 아니면서 체중 증가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신체상에 대한 왜곡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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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완치(cure)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완전관해(complete recovery)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일까? 맹장염이나 감기 같은 급성질환은 완치 후 정상생활로 빠른 복귀가 가능하나 암과 같은 만성질환은 재발의 위험을 가지고 있다. 항암치료로 암덩어리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해도 의사들은 완전관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환자들에게 설명한다. 향후 몇 년을 더 지켜본 후 재발하지 않고 건강히 생존할 때 비로소 완치라고 명한다. 거식증 역시 그렇다. 거식증은 재발률이 매우 높은 정신질환이다. 정상체중이 되었다고 해도 음식과 운동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계속해서 체중 증가에 두려움을 느낀다. 부분 관해는 겉보기에만 거식증을 이겨낸 것처럼 보일 뿐 속으로는 여전히 거식증 환자인 것이다. 완전관해의 상태가 되었다 해도 삶의 어떤 시련 앞에서 또다시 거식행위를 선택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나 역시 63킬로까지 살이 찌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겨우 40킬로를 넘는 몸무게이다. 그래서 거식증 환자를 치료할 때에는 내과적 질병을 방지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체중을 증가시키는 것이 일차 목표가 되지만 후에는 심리치료가 필수이다.
3.5화에서 언급했던 K는 현재 건장한 몸을 갖고 있다. 그러나 늦은 시각에 음식을 먹기 어려워하고 식사 후에는 언제나 많이 먹은 자신을 반성한다.(절대 많은 양이 아니었음에도!!) 자신이 선택해서 먹는 음식은 수용하는 편이지만 타인이 음식을 권하면 곧바로 화를 낸다. K의 눈길이 닿는 곳에 누군가가 음식을 놓아두는 것도 싫어한다. 식사시간 외에 어머니가 간식을(예를 들면 부침개나 토스트 같은 것들) 만드는 것에도 화를 낸다. 먹으면 살이 찌는데 만들어 주신 거니 안 먹을 수 없어 만든 행위 자체가 잘못이라는 게 K의 논리이다. 손을 넣어 구토를 유발하지는 않지만 많이 먹으면 소화시키지 못하고 음식물을 토한다. 수시로 뱃살을 꼬집고 있는데 뱃살을 주무르면 조금이라도 배의 지방이 분해될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K는 더 이상 음식을 거부하지 않고 건장한 몸을 소유하게 되었지만 자신의 신체에(지방) 대한 불만은 지속되어 왔다. 켜켜이 쌓인 그 불만은 세월의 옷을 입고 분노의 방식으로 타인에게로 향했다. K는 어디서든 살이 찐 사람들을 보면 꼭 한 마디씩 비난의 말을 퍼부었고 심지어는 그들을 더럽고 냄새나는 존재로 여겼다. 이상형도 당연히 마른 여자로 일말의 뱃살도 용납하지 않아왔다.
K가 저체중에서 벗어나고 20년이 흘렀다.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음식에 대한 자신만의 룰과 체형에 대한 강박사고들이 K 자신에게 괴로움을 주는지 아닌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K가 거식증에서 완전히 자유로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목표는?
나는 영양부족으로 여러 내과적 질병에 시달리고 있기에 어느 정도 체중을 회복하고 영양을 섭취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이다. 45킬로. 우선적으로 내가 도달하려는 몸무게이다. 45킬로 정도는 돼야 장시간 외출이나 모임에 참석하기, 소일거리 등을 해내는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 테다. 대학생 때 집착하던 43킬로를 넘어서는 것을 목표로 두면 살찌는 것이 공포가 아닌 또 하나의 성취감을 주는 과제로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45킬로가 된 다음은?
나는 45킬로가 될 때까지 내가 얼마나 많은 번뇌를 하게 될지 안다. 몸무게가 늘어갈 때마다 나의 운동 시간도 늘어갈 것이고 식단에 대한 고민도 늘어갈 것이다. 지금으로서 가장 큰 두려움은 소화기능이 제대로 작동해서 더 많은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몇 년이나 외면해온 식욕이 폭발하는 것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허기는 지지만 입맛은 떨어진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음식을 섭취하면 배고픔이 참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사교육의 홍수 속에서 최소한의 비용과 최대의 노력으로 서울대에 입학한 지방 출신 학생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 학생이 서울대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이 천재이거나 온전히 공부를 즐겨서가 아니라, 부모의 기대와 성공할 길은 명문대뿐이라는 신념, 가난에 대한 자격지심, 본인의 엄청난 노력으로 이뤄진 거라고 가정해보자. 자신의 십 대를 전부 공부에 바쳐서 이뤄낸 단 하나의 성공. 서울대생이라는 것이 곧 20살 그 학생의 모든 것이자 그 학생 자체일 것이다. 그 학생이 겉으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내면 깊숙이 지방대생을 무시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우리는 그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너무도 인간적인 마음이지 않은가? 그러나 지방대생을 실제로 비하하고 지방대생이라는 이유 하나로 인격적인 모독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 학생이 서울대생으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리고 대우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만한 노력을 했고 그것은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나 자신처럼 공부하지 못한 사람들을 아래로 보고 공부라는 단 하나의 잣대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왜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일까? 20살의 그 학생의 인생에는 공부 외의 다른 경험은 극히 적을 것이다. 일반 학생들이 평범하게 누렸을 친구와의 여가시간, 부모님과의 여행, 십 대의 방황에 대해 깊은 공감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공부와 그로 인한 성과뿐인 그 학생이 삶의 여러 기준과 가치를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고 오기로 이뤄내면서 쌓아온 불만과 결핍들을 공격적으로 표출하며 자신의 노력을 인정받고 싶어 지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마음일 것이다.
상황만 다를 뿐이지 이와 비슷한 경우가 우리 주변에 왕왕 있다. 나는 거식증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체중 조절의 노력이 너무도 힘들어서 살이 찐 사람들을 미워할 수 있다. 뚱뚱한 것을 비판하며 자신의 노력을 인정받고 싶어 할 수 있다. K처럼 체중조절을 못하는 자신에게 화나는 마음을 타인에게 돌릴 수도 있다. 나 같은 경우는 반대로 체질적으로 말라서 뭐든 잘 먹는 사람들이 그렇게 밉다. 운동과 식이조절을 온전히 즐기면서 마른 몸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만큼 마음에 그림자가 생긴다. 그것은 타인을 미워하는 마음이 아닌 나 자신을 공격하는 형태로도 발현되곤 한다. 작용과 반작용처럼.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결코 죽지 않는다. 그들은 산채로 묻히고, 어떻게든, 언젠가는 더욱 흉 축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아직 1차 목표에도 다다르지 않은 내가 부분 관해에 대해 고민한다는 게 우습지만 어떻게든 회복 과정에서 생기는 그림자를 줄이고 싶다. 요즘 나는 완치라는 개념보다는 거식증과 좋은 친구를 맺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모델 한혜진 씨는 TV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해 건강주스와 기름 없이 조리한 달걀 프라이, 데친 오징어와 토마토 등으로 하루 섭취 총칼로리가 488칼로리였음을 보여주었다. 방송은 그녀가 미식이 아닌 식이요법에 충실한 식단을 유지하는 탑 모델의 자세를 가졌다고 자막을 넣었다. 실제 한혜진 씨의 심리상태를 내가 전혀 알 수는 없지만 방송에서 보이는 모습이나 그녀의 활발한 활동은 매우 건강한 삶을 사는 것처럼 느껴진다. 스트레스는 있겠지만 나처럼 정신질환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내가 살찌는 것이 그토록 싫고 받아들일 수 없다면 건강이 위험하지 않을 정도의 몸무게를 유지하면서 한혜진 씨처럼 식이조절을 할 수 있진 않을까? 그녀와 나의 차이는 무엇일까? 6화에서 소개한 나의 조리법과 메뉴들 역시 건강에 좋고 포만감은 큰 요리들이다. 그것을 토하지 않고 소화시키며 운동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되지 않을까? 한고은 씨 역시 과거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저염식, 저칼로리를 습관화시켰어요. 그것이 계속되다 보니 살을 빼고 다이어트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이어트가 되고 어느 순간 더 이상 살이 찌지 않아요."
물론 그녀들은 모델과 배우라는 보이는 직업을 가지고 있고 어느 정도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그 이상의 보상을 받는다. 일반 사람들은 '식당 찌개에 물을 부어 먹으며 유난을 펼치는 저염식, 저칼로리 식단으로 평생을 사느니 퇴근 후 치맥을 행복하게 먹겠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이유 씨 역시 다이어트 스트레스로 폭식 증세를 보여 정신과 상담을 받았다. 그 후로 아이유 씨는 하루 한 끼는 먹고 싶은 음식을 먹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 역시 이런 식습관과 운동을 습관화시키고 거기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적절하게 풀어주어 (하루 한번 간식이나 일주일에 한 번은 치맥을 먹는 식의) 그림자를 최소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나는 아직도 심한 저체중. 41킬로를 넘어서는 순간 큰 죄책감, 실패감, 불안감을 느껴 입맛을 잃는다. 병원에 가서 듣는 말은 진부하고 식상하다. 의사들은 먹는 양을 늘리고 운동할 것을 권유하며 세로토닌이나 프로작, 올란자핀 등을 처방한다. 말로 하면 쉽지만 거식증 환자들에겐 너무도 어려운 일. 입원해서 먹은 위의 식판 사진을 보고 나의 치료 의지를 의심할 사람도 많겠지만 하루에 200칼로리도 먹지 않았던 당시에는 최선의 노력이었다. 하지만 의사들의 진부한 그 말들이 답일 것이다. 부분 관해에 도달하는 것은 먼 이야기지만 길은 있을 것이고 나는 결국 도착할 것이다. 강박사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해도 한고은 씨처럼 그것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스스로는 괴롭지 않을 것이다. 주변에서 나를 어떻게 본다고 한들 내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많은 이상심리와 정신질환의 기준은 본인의 괴로움이다. K가 부분 관해의 상태인지 완치인지 타인인 내가 함부로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이 사실은 좌절과 포기를 포장하려는 노력인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외모로 먹고살 것도 아닌 내가 조금 살이 찌더라도 마음껏 먹고 맛의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이지 않을까? 다른 일반 사람들처럼 말이다. 서두에 말한 것처럼 거식증 환자의 치료는 체중 증가와 함께 심리치료를 필요로 한다. 먹어야 체중이 느는데 이 먹는 일에도 심리적 지지가 필요하다. 깡 마르지 않아도 나는 나이고 나 자체로 이미 경이로운 존재이지 아니한가.
답이 무엇이고 결과가 어떻게 되든 우선은 체중을 늘리는 것. 그것에 집중해 오늘도 최선 다해 먹는 것에 도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