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 및 각종 정신질환과 동행하는 인간의 삶
요즘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지금 내가 불안해하며 걱정하는 것들의 80% 이상이 전부 내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지 아니한가?
비행기가 이륙할 때 바깥 풍경을 보면 점차 공항과 활주로, 주택들과 아파트, 거미줄 같이 엉켜있던 도로들이 작은 점이 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그 장면을 바라볼 때마다 인간이 얼마나 작고 여린 존재인지 생각하곤 했었다. 대자연에 비추어 봤을 때 하찮다는 표현이 과하지 않을 만큼 인간은 작디작다. 우주적 시각으로 보면 더욱더 그러하다. 타노스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것 만으로 사라질 수 있는 존재이지 아니한가. (ㅋㅋ)
이토록 인간은 작은 먼지 티끌 같은 존재이지만 그렇기에 모든 것을 회의적으로 생각하며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태도를 가지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의 삶과 생명이 거룩하다고 전하고 싶다. 이런 나의 생명 하나도 이 우주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자연의 한 귀퉁이가 되며 역사가 되고 하나의 배경이 되어 지구를 이루는 것 아니겠는가. 현재 내 고민과 괴로움은 언젠가 지나갈 것이며 대우주에 견주어 보면 한낱 사념에 불과하다. 심지어 내 고민의 80%는 현실이 되지 않은 채 사라진다.
13화 Para - Suicide에서 나는 삶의 동기를 되찾고 외모 외의 가치 있는 것들로 나와 내 주변을 채워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하루에 사과 하나>의 저자 엠마 울프 역시 거식증을 이겨내야만 하는 이유, 즉 동기가 치료에 가장 도움이 됐으며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자신을 단단히 할 수 있는 무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https://brunch.co.kr/@aiyouri/21
환자의 의지가 중요하지 않은 치료가 어디 있겠냐만은 '중독'에 대한 치료만큼 환자의 의지와 동기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치료도 없을 것이다. 약물의 도움도 폐쇄병동 입원도 환자의 의지가 없다면 도로아미타불이다. 그만큼 환자의 의지가 병마와의 싸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치료에서 동기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섭식장애. 이 지긋지긋한 삶의 변화의 시작점은 어디일까? 나는 단연코 치료의 동기를 갖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문제의 심각성을 스스로 깨닫고 바뀔 필요를 느끼는 것.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말이다. 나의 마음이
변하고 싶다....... 이제 그만,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어.
더 이상은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이런 마음들로 가득 차야한다. 그러나 이것으론 부족하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넘어. <꼭 변화해야만 하는 이유>를 가져야 한다. 또한 동기 못지않게 중요한 <자신을 믿는 마음>도 꼭 필요하다. 변화에 대한 마음은 수시로 내 마음에 들어오지만 내 몸과 마음에 착상되지 못한 채 흘러나가기 일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치료 시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프로차스카(Prochaska)와 그의 동료들이 개발한 범이론적 모델 Transtheoretical Model (TTM)에 따르면 문제행동에 대한 인간의 행동변화는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친다.
행동의 변화 5단계.
1.Precontemplation :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단계.
2. Contemplation : 문제를 인식하고는 있지만 행동을 실행하지 않는 단계.
3. Preparation/Determination : 변화를 위한 작은 노력을 시도하는 단계.
4. Actoin :실제로 변화된 행동에 몰입하는 단계.
5. Maintenance : 긍정적인 변화를 유지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단계.
이것을 그대로 거식증 변화에 도입해보면 이런 단계로 나뉘지 않을까.
1. 고려 전 단계 : 거식 행동과 칼로리 상쇄만이 유일한 해결책이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 믿는 단계.
2. 고려 단계 : 거식 행동으로 잃은 것을 생각하기 시작하는 한편 거식증으로 얻은 점 또한 생각하며 두 가지를 저울질하는 시기.
3. 준비/결정 단계 : 거식증으로 잃은 점에 대한 깨달음이 그간 누려 온 장점을 앞지르는 단계.
4. 행동단계 : 행동을 실제적으로 바꾸기 시작하고 거식 행동 외의 대처방식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쌓이기 시작하는 단계. 주변의 적극적인 격려와 도움이 가장 필요한 시기.
5. 유지단계 : 변화된 행동을 강화하고 장기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기.
치료 동기가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하는 시기는 고려 단계와 결정 단계라고 생각한다. 엠마 울프는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마음이 그간 누려온 거식증의 이점들 보다 앞섰다. 마른 몸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생긴 것이다. 나는 어떠한가?
14화에서 나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고 선언했다. 내가 노력의 20대를 보내 꿈을 이룬 것처럼, 그 목표가 나를 살아가게 한 것처럼, 나는 또 다른 노력의 30대를 보내며 살아갈 것이다. 지금의 나와 정 반대의 사람들이 서 있는 곳.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세계로 가는 것이 나의 새로운 목표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의 곁에 나도 서 있고 싶다. 어색하지 않은 모습으로.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너무 광범위하고 지금 시점에선 허무 맹랑 하기까지 한 목표이다. 나처럼 자존감이 낮다 못해 자신의 신체를 자각조차 못하는 사람에게 갑자기 본인을 사랑하라는 말은 뜬구름 잡기나 다름이 없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게 대체 뭐요?라는 질문이 되돌아올 뿐이다. 이런 내가 < 나를 사랑한다>는 목표를 어떻게 현재의 거식증 치료와 접목할 수 있을까? 나의 구체적인 동기는 무엇일까?
현재의 나는 고려 단계와 결정 단계 그리고 행동단계를 수도 없이 오르내리고 있다. 매일 거식증의 그림자에게 더 이상 내 삶의 주도권을 건네주고 싶지 않다고 수천번 다짐한다. 그와 더불어 "그래도, 하지만, "으로 시작하는 문장들 또한 수만 번 생각한다. 그러다 어느 날, 밥을 먹어 목표한 열량을 채우고 구토나 그 외의 보상 행동을 일절 하지 않은 날 또한 보낸다. 이렇게 직접적인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결론적으로 그 세계(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 현재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의 목표들을 세우는 것이 우선이다. 14화에서 내가 되고 싶다던 사람. 현재 내 주위에서 누구보다 자신을 아끼고 그렇기 때문에 타인도 아껴줄 수 있는 그 사람을 닮는 일. 그리고 그것을 그 사람에게 인정받는 일. 이것이 나의 우선적인 목표이다. 혹자는 이 목표 또한 추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그래서 나는 이 목표를 위한 더 작은 단위의 목표를 세우고 그에 맞는 작업들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1. 거식증이 내게 미친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를 눈으로 확인하기.
많은 사람들이 섭식장애는 무조건 환자에게 부정적이며 단점만이 있는 백해무익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섭식장애는 확실한 패턴을 가진 중독행동이고 이런 중독 행위는 환자에게 장점 또한 제공한다. 그것이 객관적인 장점이 아니더라도 환자 본인에게는 이로운 혹은 이롭다고 믿는 점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기에 중독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시각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비중의 차가 좁혀지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 비중의 차를 좁히는 일에 바로, 치료 동기가 치트키 역할을 하는 것이다.
미술작업 외에 매주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이 하나 더 있다. 미술치료와 작업 내용은 같지만 스스로의 변화는 물론이고 자각하고 있지 못했던 자신의 컨디션까지 체크해 볼 수 있는 작업이다. 방법은 아래의 표를 매주 작성하는 것인데 각 항목마다 스스로 점수를 매기는 것이 포인트다.
모든 작업이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장단점은 물론이고 점수 역시 스스로 작성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확인받는 일기가 아닌 나만의 비밀 일기를 쓰듯이 솔직하게 작성해야 그 효과를 볼 수 있다. 이 표를 작성하고 나면 자신의 마음이 어디에 더 기울어져 있는지, 어떤 편파성을 지녔는지를 명확하게 볼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자신이 섭식장애의 어디쯤 와 있는지 그 현주소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것이 사실 이 작업의 가장 큰 결과물이다. 왜?
이 작업을 통해 자신에 대해서 보게 되면 본 것을 계속 생각하게 되고 계속 생각하다 보면 사람은 불편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불편감을 증폭시키면 절대적으로 인간은 변화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맨 처음 이 작업을 시작했을 땐 거식 행위의 장점이 70% 단점이 30%의 비율로 작성됐었다. 심지어 거식행위를 하지 않았을 때의 장단점은 단 한 줄도 쓰지 못했었다. 또한 매주 같은 작업을 하다 보면 매주 같은 글이 적힐 것 같지만 매번 미묘하게나마 다른 글들이 적히며 점수 또한 달라진다. 그렇다고 언제나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좌절하고 거식과 폭식을 반복하더라도 포기해서는 안된다. 변화하는 것엔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섭식장애를 앓은 시간이 길수록 변화하는 기간도 길 수밖에 없다. 변화에 대한 인내력을 갖고 꾸준히 하다 보면 분명. 분명. 느끼게 된다. 변화를!
또 하나 이 작업에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은 점수를 매김으로서 무엇이 나에게 중요한 가치이며 그 비중의 크기가 어떠한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 수치를 통해 왜 거식행위를 하고 왜 그 행위를 이어나가는지를 알게 된다. 결론적으로 나의 욕구를 탐색하게 되는 작업이며 이 욕구를 채울 수 있는 올바른 대처 방안을 찾는 다음 단계로 발전하게 된다.
2. 스스로에게 동기부여를 위한 질문을 던지기.
여러 고뇌 속에서 결국 내가 긍정적인 행동을 실현할 때에 비로소 동기가 치트키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1번의 작업을 통해 나에게 중요한 가치 기준이 사람들과의 유대감과 통제력에 대한 성취감임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동기와 현재의 나의 마음을 접목시키면 이런 문장이 된다.
그 사람에게 내가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 내가 나를 아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나를 아낄 수 있기 때문에 나도 당신을 아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알려주고 싶어. 내가 잘 먹고 건강해서 안 해도 되는 걱정 끼치지 않을게 내 곁을 떠나지 말아 줘. 외로워서 거식을 선택했는데 거식증 때문에 더 외롭잖아. 사회적 과업을 이루는 것은 아직 부담스럽지만 나는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이잖아. 그렇게 살아왔잖아. 나는 마른 몸이 아닌 다른 것에서 충분히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야.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이 내 주변에 가득했으면 좋겠어. 그들과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 예쁨을 넘어 아름다운 사람이 될 거야.
물론, 이 문장들이 나를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은 아닐 것이다. 아직도 나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한, 혹은 사람들 곁에 있기 위한 또 다른 페르소나를 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2부 3화에서 이것에 대해 더 깊이 다룰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것이 지금 나의 현주소인 것을. 어찌 됐든 이런 생각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런 동기를 더 끌어올리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곤 했다.
거식행위를 계속하면 현재 내가 걱정하는 것들이 사라지거나 그 수치가 줄어드는가?
거식행위를 계속했을 때 (내가 닮고 싶다는) 그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거식행위를 계속했을 때 스스로를 사랑하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할까?
거식행위를 줄이거나 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더 좋게 생각할까?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그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은가?
나는 소중한 것을 지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지?
3. 일상 기록지를 작성해 자신의 패턴을 확인하기.
일상 기록지는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먼저 일주일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적어본다. 그 뒤 같은 양식에 다음 주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상상으로 일주일의 일상(혹은 더 작은 단위로)을 적어본다. 다음으론 직접 일상을 지내면서 상상으로 적은 일상 기록지에 다른 색의 펜으로 실제 일상을 적는다. 그 후 또 다른 색으로 계획대로 되지 못한 이유를 적는다. 그 이유를 계속해서 읽다 보면 자신에게 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필자가 이곳에 공개한 기록지는 방법을 알릴 의도이기에 짧은 예시로 보여드렸지만 계속 기록을 이어가면 확실한 패턴이 눈에 보이게 된다. 사진에서만 보더라도 낮에 굶고 저녁에 몰아 먹기 때문에 구토를 하게 되고 수면이 늦어진다. 이는 다음날까지 영향을 미쳐 기상이 늦어지고 지난날의 자괴감에 우울한 하루를 시작하게 되는 패턴을 확인할 수 있다. 더 상세하게 적을수록 더 많은 패턴을 인식하게 된다.
하루에도 수 없이 다이어트 기사들이 쏟아지고 모두 하나같이 굶는 다이어트는 폭식을 불러일으키고 더 악영향을 끼친다고 말한다. 이 당연한 말을 내 눈으로 직접 인식하고 인지하는 것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을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과 같다. 비단 식습관 외에도 작은 생활 습관들도 마음만 먹으면 이 일상 기록지로 교정할 수 있다. 공개한 예시에는 나의 활동 내용을 축약하여 올렸지만 전체를 두고 보면 아주 사소한, 예를 들어 스트레칭을 하는 것에서도 패턴이 있음을 알게 된다. 위의 예시는 이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기 때문에 상상으로 적은 일주일의 일상과 현실과의 괴리감이 매우 크다. 이것은 실패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좀 더 실천하기 쉽고 현실성이 있는 일상을 상상하여 적는 것이 좋다.
계획대로 지켜진 부분들도 다른 색 펜으로 그 이유를 적어보는 것 또한 아주 좋은 작업이다. 힘든 순간을 어떻게 견뎠는지 적다 보면 이것 역시 패턴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이 내게 힘이 되고 있는지를 절절히 체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실패한 것보다 성공한 것에 더 초점을 맞추면 된다. 나를 먹게 하고 보상 행동을 하지 않게 해주는 점들을 강화시키면 무엇보다 변화에 속도가 붙는다.
4. 대안행동 모색하기.
사람은 누구나 일정한 균형을 맞추려는 항상성을 갖고 있다. 체온이 올라가면 땀을 배출하고 체온이 내려가면 몸을 떨거나 웅크려 적정 온도를 유지하려는 것이 바로 항상성이다. 이런 항상성이 깨질 때 질병을 앓게 된다. 정신 역시 그러하다. 인간은 부정적 결과가 예측될 때 문제행동에 더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 말라고 하지 말라고 하면 균형을 맞추려는 본능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해야 하는 이유에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질병의 패턴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에게 무조건 행동을 억제하는 것은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고 여러 번 언급해왔다. 그렇기에 문제행동 소거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행동을 더 하게끔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대안 행동을 찾는 것이 유지단계로 가는 길이다.
나 역시 위의 '거식 행동을 하지 않았을 때'의 단점에 < 공허함이나 외로운 마음이 해소되지 않는 다> 항목이 있다. 심지어 점수는 -100점. 거식 행동이나 보상 행동 외에 외로움을 달래 줄 만한 다른 행동을 찾고 그것에 집중할 수 있다면,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거식증의 늪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또 하나 항상성에 대해 덧 붙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본래의 항상성이 깨져 질병이 발현된 거라면 반대로 질병이 발생했기 때문에 항상성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몸에 염증이 생기면 신체는 열을 발생한다. 염증과 싸우기 위해 열이 증상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이 열은 우리를 살아남게 하기 위해, 건강한 신체의 항상성을 위한 일이었다. 다만 나에게 그 증상이 너무 오래 머물도록 허락했고 다른 처치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역설적이게도 섭식장애는 나를 살아있게 도운 녀석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의 전환은 길고 긴 섭식장애와의 싸움에서 지치지 않게 해 준다. 무작정 섭식장애를 미워하는 것이 아닌, 병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긴 여정을 해쳐나가는 데 버팀목이 된다. 특히 섭식장애 주변 사람들에게 그러하다.
5. 설령 그 모두가 포기하더라도 자신을 믿기.
반복되는 이야기이다. 섭식장애와의 싸움은 인내를 필수적으로 요한다. 자기 확신과 믿음이 없다면 변화의 단계를 오르내릴 때 좌절감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게 된다. 좌절감에 함락되는 것이 아니라 좌절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론에서 동기와 함께 변화에 꼭 필요한 요소로 뽑은 것이 바로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작심삼일이더라도 4일째 다시 작심하면 되는 것이고 한번 불편감을 가진 행동은 언제 가는 어떤 형태로든 변화하게 되어있다. 잘게 쪼갠 작은 목표들을 하나 씩 이루면서 성공의 경험을 모으다 보면 결국 거룩하고 큰, 한 발자국을 걷게 된다. 어떤 것도 늦은 것은 없고 살아만 있다면 문제는 해결된다. 내 주변의 모두가 나를 포기하더라도 자신만은 희망을 잃지 말자. 살기 위해. 더 잘 살고 싶었던 마음에 지금 아픈 것이라는 걸 잊지 말자.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응. 할 수 있다!
나를 사랑한다는 추상적인 문구가 과연 이 무겁고도 거대한 장애와 싸울만한 동기부여가 되느냐고 누군가는 질문할 수 있다. 나는 단연코 그렇다고 답한다.
주위를 둘러보라. 유유상종.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자존감 높은 사람들, 스스로 빛을 발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 그들의 곁에 서 있는 내 모습이 자. 연. 스. 럽. 길. 바란다. 어린 시절, 도움을 받기만 하는 사람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마음처럼. 이제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의 세계로 가고 싶다.
십 대 후반, 나는 중졸의 방황하는 청소년이었고 대학 등록금을 지불할 땐 전공 살리기도 힘든 요즘 시집이나 가라며 비웃음을 샀었다. 그러나 나는 석사를 취득하고 각종 자격증을 섭렵하며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까지 묵묵히 걸어왔다. 19살의 내가 이 모든 것들을 이뤄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을까? 하나씩 작은 성공의 경험이 모여 지금에 이르렀다. 그 일에 십 년의 세월이 걸렸다.
나를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데에는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그렇지만 결국엔 도달할 것이다.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위치까지 왔는지는 모르지만 스스로는 아직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를 사랑한다'는 이 목표가 나를 살아가게 만들 것이다. 더 당당한 마음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아름답게 이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결국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모든 사람의 삶이 거룩한 것이고 의미 없는 일이란 없다. 한 평생 땅을 일구며 살아온 농부와 뉴욕의 마천루들 속에서 바삐 살아가는 사람의 삶을 비교할 수 있는가? 인권운동에 압장서 온 사람과 가족들을 부양하고 보살피며 살아온 사람의 삶을 저울질할 수 있는가? 성공이란 게 달리 특별한 것이 아니다. 한 끼 잘 먹은 오늘은 내게 성공이다. 오늘과 오늘이 모여 나의 인생이 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