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 및 각종 정신질환과 동행하는 인간의 삶
섭식장애에 대한 글을 완결 짓고 싶었다. 나 스스로 지긋지긋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섭식장애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이 오히려 나를 좀먹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지금 상태로 섭식장애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섭식장애와 지겨운 싸움을 이어나가는 지금 끝을 내버린다면 패배자, 실패, 거짓말 등의 부정적인 기억으로 마무리될 것 같았다.
한 편의 글을 쓰는 것에 꽤나 많은 시간이 걸린다. 내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매우 지치고 최대한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쓴다. 지금처럼 오랜만에 글을 이어나가기 위해선 내 글들을 다시 읽어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글을 쓰는 일 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내 글을 읽었을 때에는 내가 위로받고 말았다. 명쾌해진 답들이 보였고 진실된 변화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댓글들에 다시 한번 힘을 얻었다.
5화에서 '거식증과 친구가 되어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모델이나 여배우들이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몇십 년의 세월 동안 절식한다는데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지 않을까?'에 대해 이제는 절대적으로 NO!라고 답할 수 있다. 이미 지난 글에서 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거론하며 마음속에 생긴 그림자는 어떻게든 더 지독한 것으로 표출된다고 했다. 내가 마른 몸에 대해 만족스러울 만큼 긍정적인 보상을 받지 않는 다면 그것은 내게 그림자가 될 뿐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무엇보다 증상이 심한 거식증은 죽음과 너무 밀접해서 친구처럼 지내려는 접근보다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치료에 힘써야 한다. 내가 조울증을 약물로 다스리고 무너져도 좌절하지 않고 일상생활을 유지하려 힘쓰는 것은 조울증과 친구처럼 지내는 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식사를 최대한 절제하며 마른 몸에 집착하는 일상을 유지하는 것은 섭식장애와 동행하며 지내는 것이 아니다. 병을 유지시키고 나아가 악화시키는 일일 뿐이다. 거식증 완치까지 여러 번의 관해를 경험하게 된다. 여러 번의 관해를 받아들이고 계속해서 치료에 힘쓰는 것이 진정 이 병마와 동행하며 삶을 살아가는 자세이다.
제2부에서 호기롭게 치료에 중점을 둔 글을 쓰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작년에 45킬로 넘게 살이 찌다가 다시 36킬로 까지 살이 빠지며 오르막과 내리막을 오갔다. 음식물이 위에서 십이지장으로 내려가지 못한다는 진단마저 받았다. 힘들었다. 그래서 브런치에 글을 쓸 수 없었고 잘할 수 있을 거란 기대만큼 실망도 커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살면서 무력감에 잠식당해왔어도 무기력하진 않았다고 나름 자부했는데 실망의 마음은 나에게 무기력을 선사해주었다. 그러나 이런 롤러코스터 같은 일들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있지 않은가. 삶은 절대 직선이 아니라는 말. 삶은 나선형이다. 지금 당장 내가 후퇴한 듯 보여도 나선형으로 바라본다면 '넘어짐'이라는 한 발자국을 걸어 나간 것이다. 또다시, 넘어진 것 같더라도 매번 같은 넘어짐은 없지 않겠는가? 그 넘어짐을 딛고 일어서면 나는 또 새로운 성공적 경험을 이뤄낸 것이다.
엄청 잘하거나 발전을 이룰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그냥.. 그냥 매일매일 조금씩 해나 가기만 하면 될 것 같아요. 그러면 언젠간 나아진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요?
제2부 2화에 달린 소중한 댓글이다. 어쩌면 이미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애써 밝고 애써 잘 해내려고 노력했던 내가 보였던 걸지도 모른다. 저분의 말씀처럼 그저 조금씩 매일 노력하는 것. 엄청 잘하거나 큰 발전을 이루는 노력을 보이려 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하다.
그동안 나는 쉰다는 게 어떤 것인지 몰랐다. 쉬고 싶다. 그런데 어떻게 쉬는 것이지? 지금에 와서야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일 년 동안 시간을 어떻게 더 빠르게 삭제시킬까를 고민하며 무기력하게 지내다 보니 쉰다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쉬어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도 사실은 얼마나 많은 부담감과 죄의식을 느끼며 지냈는지를 깨달았다. 안식년이라고 굳이 명명하는 것이 비겁한 변명이고 합리화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설적이게도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나서야 진정한 휴식을 취했다는 감각이 느껴졌다. 정말 푹 쉬었다는 감각을 느끼기까지, 정말 최악의 최악의 바닥을 맛봐야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존재라고 느낄 정도의 바닥에서야 모든 부담감을 벗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좀비가 되어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살다가 바깥으로 나왔을 때, 신선한 공기가 가득 내 폐로 흘러들어왔다.
지인들을 만나 신나게 노는 일이 휴식을 취하는 일이랑은 다른 것처럼 죄의식을 느끼며 시간을 보내는 일과 내 심신을 돌보는 일은 다른 일이다.
사람은 바람결에도 배운다고 생각해왔다. 아무것 하지 않아도 사람은 그 속에서도 얻는 것이 있다고 믿어왔다. 꼭 무언갈 배워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무엇도 의미 없는 시간은 없다는 말이다. 처음 직장을 그만두고 휴식과 치료에 몰두한 18년도보다 무기력하게 보냈던 19년도가 더 휴식을 취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18년도의 시간이 무의미할까? 그렇지 않다. 18년도의 방황과 깨달음, 그 해에 맛본 바닥들이 있었기에 19년을 경험할 수 있었고 그리고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2년 동안 내가 얻은 것들이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것들은 아니지만 내실이 다져졌음을 느낀다. 걸어 잠근 문을 열고 나왔을 때 상쾌한 공기를 맛보았다는 것은 나의 변화를 명확이 느낄 수 있었단 뜻이다.
정신과 전문의 엘리자베스 쿠블러 로스는 사람이 슬픔을 이겨내는 데에도 단계가 있다고 한다.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이 슬픔의 5단계는 본래 죽음을 앞둔 환자의 심리적 반응을 체계화하고자 사용됐지만 오늘날에는 죽음, 상실, 트라우마 같은 여러 심적 고통을 다루는 데에도 응용되고 있다.
쿠블러 로스가 제안하는 슬픔의 단계는 위의 사진처럼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순서를 갖는다. 사람의 다양성을 이 이론 하나로 모두 일반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나는 지난 2년 동안 이 작업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내가 호구라는 것을 부정했었고 애정에 굽신거렸던 지난 나 자신에게 화가 나고 수치스러웠다. 나에 대해 객관적으로 보게 될수록 자신감이 떨어졌다.
내가 거식증이라는 사실을 부정했었고 나를 이렇게 만든 모든 것들에 분노했다. '그래, 나 섭식장애를 갖고 있어.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해?'라는 질문에 우울했고 계속되는 좌절에 무기력했다. 아직도 온전히 이 모든 것들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지만 수용의 작은 조각들이 하나씩 내 마음에 차오르고 있을 거라 믿는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지난 2년간 나는 나를 진정으로 수용하는 작업을 해내고 있었다. 다음화에서는 내가 명확히 느꼈다는 변화들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고백을 이어나가고자 한다.
내 글의 방향성이 보여주기 식이 아닌, 초심처럼 나 자신을 위한 고백이 되길 바란다. 더불어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 조금 더 가벼운, 조금 더 소통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