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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리 Jan 30. 2020

제3부 2화 만족스러운 변화

섭식장애 및 각종 정신질환과 동행하는  인간의 삶


 피부가 건성인 나는 매년 겨울이면 발의 각질을 벗겨내곤 했다. 손으로 뜯다가 더 이상 뜯기지 않으면 각종 도구를 이용해서 벗겨냈다. 나는 그 행위에 희열감까지 느꼈다. 결국 피를 보고 걷는 것조차 힘겨워져야 가까스로 각질 뜯기를 멈췄다. 상처가 아물어 조금 걸을 만 해지면 다시 뜯고 벗기기를 반복하며 겨울을 보내곤 했다.

  이번 겨울에 나는 발꿈치의 각질을 벗겨내지 않았다. 뒤꿈치가 거칠어지면 나는 바셀린을 듬뿍 바르고 수면양말을 신었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밤마다 발바닥 가죽을 그리 독하게 벗겨내는지 아닌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각질을 넘어 피부 가죽을 벗겨내는 일종의 자해를 나는 스스로 멈췄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거나 칭찬받기 위해서가 아닌 나 스스로를 위한 일이었다.

 감기가 걸리면 기뻐했고 상처가 나면 돌보기는커녕 자랑하던 나였다. 그러다 나를 걱정해주는 지인들 덕에 그들에게 칭찬받기 위해 병원을 가곤 했다. 그리고 지금 그 누구의 관심 때문이 아닌 나를 위해 자해를 그만두었다. 온전히 나 자신만을 위해 행한 첫 번째 일이었다. 



 

 무엇보다 큰 발전은 무력감에 대응하는 사람으로 성장한 것이다.

 예전의 나는 길거리나 버스에서 누군가에게 세게 밀쳐지거나 발을 밟혀도 비명은커녕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골목에서 차에 부딪혀도 괜찮다며 갈길 가던 사람.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마땅히 그러려니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하던 사람. 집단에서 억울한 입장에 놓여도 제대로 된 해명 한번 하지 못하던 사람. 거절이 힘들어 아니, 고맙다는 겉치레가 애정인 줄 착각하고 떠맡던 일들이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사람. 그게 나였다.


 나는 아픔을 느끼기 시작했다. 분노하기 시작했고 억울함에 눈물 흘리기 시작했다. 서럽다고 외치고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다. 내가 아프다는 것을, 부당하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아주 긴 여정이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까지도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 내 삶에 만연했던 그 수많은 무력감에 대항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다. 


 처음에는 아프다고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부터가 높은 관문이었다. 어렵게 내가 아프다는 걸 알게 됐는데 그걸 표현할 적절한 방법을 몰라 한참을 헤맸다. 아프다고 그 자리에서 바로 울어버릴 수도, 화가 난다고 문자 그대로 소리를 지를 수도, 왜 내게만 이러느냐고 불공평함을 대놓고 따져서도 안됐다.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삼십 대의 성인이었고 내 의견을 말해야 하는 상황은 수천수만 가지로 변화무쌍했다. 어렵게 습득한 한 두 가지 대처 기술을 수많은 상황에 이론처럼 대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술과 약에 취해 화내고 서럽게 우는 일을 오랫동안 지속했다. 술에 취해서야 속마음을 내비칠 수 있는 것이 안타깝다며 독인 줄 알면서도 차마 마시지 말라고 못했던 지인도 있었다. 엄한 곳에 화내고 있는 줄도 모르고 가장 소중히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떠맡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에도 억울함이 느껴져 눈물을 참지 못했던 나날이 숱했다. (내 집 냉장고를 내 허락도 없이 열어봤다고 집에 초대한 지인 앞에서 몇십 분을 통곡하기도 했다. 그게 뭐라고...)


 어느 날 버스에서 하차 준비 중에 뒤에서 누군가가 팔꿈치로 내 귀를 가격했다. 나는 이어폰을 꼽고 있어서 고통이 더했다. 뒤를 돌아보니 거구의 남자가 있었다. 그는 내게 사과는커녕 자신이 아닌 척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나는 기분이 나빴다. 남자는 나를 밀치고 하차 문 앞으로 갔다. 나는 어떤 이성적 사고보다 먼저 몸이 반응하듯 발로 그 남자의 종아리를 걷어차고 말았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그 남자는 내게 따져 물었다. 자신은 모르고 친 건데 너는 일부러 그런 거 아니냐고 내 얼굴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내 심장소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올 듯이 쿵쾅거리고 머리는 산소가 부족한 듯 핑 돌았다. 그럼에도 들었던 첫 번째 생각은 '자기가 친 건 줄 알긴 알았네?'였다. 그 뒤로 '어쩌지. 그냥 죄송하다고 할까. 내가 안 그랬다고 할까. 무슨 말이냐고 나도 잡아뗄까. 왜 내게 사과하지 않았냐고 할까. 죄송합니다 하며 연신 고개 숙일까.'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저도 몰랐어요."였다. 그 한마디를 내뱉고 나는 쌩하니 뒤돌아 (경보하듯) 갈길을 가버렸다. 

 지인에게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이 일화를 얘기해주었다. 지인은 나의 변화에 칭찬을 해주면서도 그 사람은 실수지만 너의 행동은 폭행이라며 따끔히 지적해주었다. 처음엔 너무도 당혹스럽고 그런 지인이 밉기까지 했지만 지인의 말이 맞다. 그럼에도 내 놀라운 변화와 그 보다 더 놀라운 내 행동에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온몸에 흥분감이 감돈다. 지인은 앞으로 또 그런 일이 발생하면 가격 당한 순간에 너의 아픔을 표현하고 합법적인 보상을 요구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나는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변하고 있다. 물리적 학대에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던 나. 신체와 정신을 훼손당해도 그래도 되는 존재라며 스스로를 하찮게 대하던 나. 그랬던 내가 내 허락 없이 내 물건을 열어봤다고 눈물 흘리고 뒤를 돌아 나를 가격한 사람을 확인하고 그 일에 기분 나쁨을 느끼고 (방법은 틀렸지만) 나름의 대항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방법은 틀렸다.)을 했다는 사실이 기특하다. 


 대항이 아닌 적절한 대응을 하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내가 되길 바란다. 




 또 다른 변화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겪게 된 변화이다. 어려서부터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했던 나였다. 혼자가 되느니 무릎을 꿇고 애정을 구걸해서라도 어떻게든 누군가와 함께이고자 했다. 버겁고 부담을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으려고 했다. 

 작년 내내 집에서 집순이로 지내면서 나는 드디어 혼자라는 고통을 마주하게 되었다. 처음엔 어색하고 역시나 고통스러웠다. 세상이 사라진 것 같았고 내가 존재는 하는지 믿기 어려웠다. 지겨울 만큼 혼자됨을 반복하고 반복하다 보니 그게 새삼 큰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대상 조차가 없거나 혹은 모른 채 느꼈던 두려움. 막연한 불안감. '혼자됨'이라는 대상을 마주하고 보니 그것은 공포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고귀하고 소중한 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에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매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적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좋아하는 것을 적는 것만으로도 우선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내가 적은 그 좋아하는 일들을 행했다. 그것이 아주 사소한 일 일지언정 내게 미치는 영향은 거대했다. 

 혼자라는 시간에 익숙해지자 대인관계에서 을이 되는 것을 자처하지 않게 되었다. 왜냐? 나는 혼자여도 괜찮으니까. 내 마음의 그 공허함을 알코올이나 약물, 영양가 없는 관계가 아닌 가장 소중한 나 자신을 위한 일들로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변화는 중요하다. 내가 쌀밥을 먹게 되고 고기를 소화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위와 같은 내적 변화는 나를 주변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미디어에 현혹되지 않고 무수한 타인의 잣대에 휘청이지 않는 나. 나랑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미의 기준이나 대중매체에서 보여주는 미의 기준에 무작정 맞추지 않는 나. 옷에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집단에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맞는 사람을 만나고 내가 나에게 맞는 옷을 찾아 입고 내게 맞는 음식을 찾아 먹는 것. 내가 원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내 주변을 채우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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