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 및 각종 정신질환과 동행하는 인간의 삶
[아무도 모른다]라는 드라마의 1화를 보았다. 주인공은 죽음에 도래한 친구의 전화를 3번이나 받지 못해 죄책감에 시달리는 여자였다. 나는 드라마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내 주변에 돌아가신 분들이 이미 여럿 계시지만 누구보다 내 가슴에 사무치는 죽음이 있다. 바로 자살한 지인의 죽음이 그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살 시도자이자 자살 생존자 (자살한 사람의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이다.
그날, 나는 그 사람에게 같이 죽는 게 어떻겠느냐고, 차라리 그냥 죽어버리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 사람은 화를 내며 "살자고, 살아야지, 살려고 이렇게 노력하는 데 그게 무슨 말이냐"며 오히려 나를 혼냈다.
그날 밤이었다. 술에 만취한 그 사람이 충동적으로 자살을 선택한 날이.
죽기 전, 그 사람은 3통의 전화를 걸었다. 수신인은 모두 나였다.
나는 단 한 통의 전화도 받지 못했다.
나를 살리려던 그 사람은 지금의 나를 보면 어떤 마음일까.
눈물에 목이 메어 미안하다는 말 조차도 건넬 수 없는 그 사람. 그 사람이 지금의 나를 보면 대체 어떤 마음일까.
이 사건이 내가 13화에서 밝힌 자살만큼은 하지 않겠다는 최후의 다짐이 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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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혼자 살고 정신병력이 오래되었으며 자살시도를 수차례 해온 고위험군의 사람으로 분류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살하지 않을 것이다. 자살은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죽지 못하는 일이다. 나를 사랑해주고 내게 마음 줬던 사람들의 가슴에 영원히 사는 일이다. 그들의 마음에 고통으로 영원히 남는 일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살 저지 요인을 갖고 있다. 이 요인이 낮거나 부재할수록 자살 위험률은 높아진다. 있는 거 없는 거 탈탈 털어서라도 자신의 저지 요인을 점검하고 마음에 소장하고 다니는 노력을 하길 추천한다. 생각해보면 꽤나 많은 요인들이 내 곁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의 또 다른 자살 저지 요인은 바로 이 브런치다. 이곳에 내 생각을 정리해 글을 업로드하고 사람들과 공감과 이해를 나누는 일이 나를 살아가게 만든다. 나를 응원해주고 업로드를 기다려주는 이들로 하여금 내게 할 일을 부여하는 일. 한 회 한 회 업로드를 통해 그것을 이뤄냈을 때의 소소한 기쁨. 성취감. 성공적 경험들이 나를 조금씩이나마 건강하고 강하게 만들어 준다. 내가 이 세상에 아직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의 요인은 내게 새로운 희망이된 일이다. 서울대학교 안용민 교수와 원광대학교 위대한 교수의 자살실태보고 조사에 따르면 자살 시도자들의 원인이 외로움이나 적응 문제, 경제적 이유보다는 정신과적 증상에 의한 것이 가장 높은 수치를 보였고 다른 요인들에 비해 그 수치가 뚜렷이 차이가 났다. 이를 반대로 생각해보면 정신과적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나는 자살은커녕 어느 정도 평범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뜻 아닐까? 자살에 한해선 현실적 문제나 미해결 과제들이 아닌 단순히 정신과적 문제가 나를 괴롭게 하는 거라면 그것만 소거하면 되는 일 아닐까?
하여 나는 알람을 설정해가며 약을 꼬박 챙겨 먹고 마음 챙김 명상을 하고 상담을 받는다. 이는 병원 치료 자체에 회의적이었던 내게 가장 큰 변화였다. 약물치료로 내 호르몬과 신경계를 조절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십 년의 세월 동안 정신과를 들락거렸음에도 한 번도 지금처럼 믿음으로 다닌 적이 없었다.
지금은 믿고 싶다. 그래서 믿는다. 나의 마음이 약물로 치료되고 적어도 내가 일상생활에서 주도권을 갖게 될 수 있다고. 나의 그림자에 지지 않는, 내 그림자를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음을 믿는다.
양질의 사랑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아무리 진정한 사랑을 내게 주어도 사랑을 받지 못하면 그것이야 말로 무용지물이니까. 사랑 이전에 망가진 나의 몸과 정신을(뇌) 치료하는 것을, 처음으로 목표로 두었다. 이것은 내가 가보지 않은 방향이자 내게 새로운 희망이다.
다음 요인은 자살 실패의 두려움이다. 자살이 실패로 돌아가 눈을 떴을 때 펼쳐질 일들. 끔찍한 절차들. 더는 피할 수 없을 입원. 그리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다시 마주해야 하는 일.
이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까. 이 만큼 미안한 일이 있을까. 이런 미래를 상상하면 정말 정말 정말 마음이 아파 신음이 다 나온다. 그러니 자살은 물론이고 시도조차도 해선 안된다는, 강렬한 다짐을 하게 된다. 미안함을 넘어 그들이 내 곁에 있지 못하도록 모두를 떠나보내고 싶어 질 것이다. 더 이상 나로 하여금 상처 받지 않도록.
더불어 내 신체 어딘가에 또 심각한 손상을 입을 거란 사실. 그것이 더 끔찍한 현실을 만들어 줄 거라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
나는 정다빈을 좋아했고 설리의 팬이 었으며 구하라를 애정 했다. 그녀들이 삶을 등졌을 때 나는 꽤나 힘들어했다. 그 예쁜 나이, 그 아름다움을 가지고 그 생기로움을 가지고 그렇게 가버리다니, 비통해 가슴을 치고 땅을 쳤다. 인정할 수 없는 그 소식들이 안타까워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누군가에겐 나 역시 그렇지 않을까. 아니, 그 누군가가 없다 하더라도 나 역시 그런 존재이지 않을까. 이미 살아있음 그 자체로 거룩하고 온전한 존재. 그러니 살아야 한다. 살아야만 한다.
나보고 살아달라고 해주는 사람들. 본인의 이익을 희생하면서도 살아달라는 사람들. 나 같은 사람이 꼭 살아야 한다는 말. 글을 써달라는 말. 세상의 빛이 되어 달라는 말.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는 3%의 소금이 되어 달라는 말. 이런 응원들이 내일의 해를 또 보게 만든다.
앞서 여러 번 언급한 것처럼. 나는 잘 살고 싶어 죽고 싶은 거니까. 사실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가슴에 품은 사람이니까. 내가 지금 당장 아프고 사회적 과업을 못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실패인 게 아니니까. 100점과 0점 사이에는 무수한 숫자가 있으니까. 그런 마음으로 살아내 보자. 살자. 모두를 위해서.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 살자. 그렇게 살거라면 잘 살아보자.
궁금하다.
죽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어떤 마음인지. 그 마음을 느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