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 및 각종 정신질환과 동행하는 인간의 삶
앞서 밝혀왔듯이 내 전신에는 수많은 흉터들이 있다. 자살시도와 자해, 그리고 학대의 흔적은 고스란히 내 전신에 남아있다. 병원이나 상담소를 방문할 때면 의사나 상담사에게 꼭 듣는 질문 중의 하나가 흉터에 관한 것들이다.
그들은 흉터의 일부를 꼭 눈으로 확인하려고 한다. 그때마다 나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난 상처를 본다고 해서 그 깊이를 알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처가 많다는 것은 알 수 있겠지만)
누구나 그렇겠지만 상처는 아물기 마련이고 흉터는 시간이 흐를수록 옅어진다. 운이 좋아 세밀한 봉합시술을 받을 수 있는가 하면 바쁜 응급실에서 의료용 스템플러로 봉합당할 수도 있다. 당연히 후자가 전자에 비교도 할 수 없는 크기의 흉터를 남긴다. 상처의 깊이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우습게도 끊어진 힘줄을 봉합한 수술, 신경을 이은 수술은 비교적 단순한 피부 봉합에 비해 더 작은 흉터를 남기고 대신 더 큰 후유증과 고통을 겪는다. 곪았던 상처, 피고름 주머니를 차고 있었던 상처, 낚시 바늘에 걸린 채 휘저어진 상처, 치료시기를 놓쳐 벌어진 상처, 부러지고 또 부러졌으나 방치됐던 코뼈, 엉덩이뼈, 부러지고 금이 간 치아, 화상으로 인한 진물에 들러붙어버린 거즈를 뗄 수 조차 없던 상처까지.
시간이 흐른 뒤 이런 상처들을 상담사나 의사가 한번 본다고 그 깊이를 다 알 수 있을까? 일일이 흉터 하나하나 그 깊이와 사연에 대해 내가 언급해야 하는 걸까?
한 번은 답답한 마음에 물은 적이 있다. 대체 왜 내 흉터를 보려고 하시는지.
"흉터로 저를 또 평가하시는 건가요? 흉터의 정도가 저의 위험도를 나타내기 때문인가요? 새로 생긴 자해 흉터가 어느 정도로 치명적인 상처인지 겉면만 보고 아시나요? 왜 흉터를 보고 싶어 하시는 거죠"
의사는 답했다. 맞다고. 나의 위험도와 상처의 정도를 확인하려 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나는 속으로 화가 났다. 흉터의 겉면만을 보고 그 상처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 알기 어렵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환자가 말해주거나 차트를 보지 않고서는 외과의사조차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떤 흉터가 더 치명적이었고 더 갚은 상처였는지 조차 분간하기 어렵다는 걸 나는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식의 평가가 얼마나 무의미한 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정말 화가 나고 서러웠던 것은 흉터나 상처의 깊이로 나의 슬픔의 척도를 가늠하려는 태도였다. 상처나 흉터의 평가가 곧 내 정신적 고통의 평가로 적용된다는 것이 나를 억울하고 수치스럽게 만들곤 했다.
종종 섭식장애를 앓았었던 상담사나 섭식장애에 대해 깊은 식견이 있는 상담사를 아느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그렇지 않은 상담사를 찾아가면 더 상처 받고 오지 않느냐는 질문과 함께 말이다.
섭식장애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상담사가 부재하다는 것에 많은 아쉬움과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적지 않은 수의 상담사들이 자신의 마음공부를 하다가 상담의 길에 들어서곤 한다. 그러나 단지 공부로서, 일로서 상담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더 많다. 약간의 고민이나 살면서 갖는 아픔들은 인간이라면 모두가 겪는 일이니까. 다시 말해 기분장애 전문 상담사라고 해서 꼭 우울증을 앓았던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비교도 할 수 없이 많을 거란 말이다. 물론 특정 장애에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상담사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수 있다. 가족 중에 우울증 환자가 있었다거나, 나름의 사명감을 가진 이유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본인의 상담기법과 잘 맞는 장애, 본인과 궁합이 좋은 내담자 층 등의 이유로 전문분야를 택하는 상담사들이 더 많다. 예를 들어 아동이 더 잘 맞는 사람이 있고 성인상담만을 받는 상담사가 있는가 하면 청소년 만큼은 못하겠다는 상담사가 있다. 기법적으로 나뉘기도 한다. 인지행동치료를 주로 사용하는 상담사가 있는가 하면 정신분석과 함께 꿈 분석을 하는 분들도 계신다.
우리는 우울증을 앓아본 사람이라면 그 경험으로 인해 우울증 환자를 더 깊이 이해해줄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게 아닐까?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깊은 공감이라는 긍정적 측면보다는 무시할 수 없는 부정적 측면 또한 있다. 우울증 경험이 있는 상담사가 우울증 환자를 받는 일은 역전이의 위험을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해 내담자를 보면서 자신의 상처가 떠올라 상담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기 어렵다는 뜻이다. 아무리 자신의 상처를 치료했다고 해도 괴로워하는 내담자가 답답해 자신도 모르게 화를 내거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담자에게 직면을 시킬 수도 있다. 혹은 안타까운 마음에 식사자리를 마련한다던지 선물을 자꾸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이렇듯 선을 넘어 과잉 관여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우리가 기대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왜 섭식장애 과거력을 지닌 사람, 적어도 섭식장애 전문 상담사를 그토록 원하는 것일까?
흉터를 보여달라는 사람들에게 내가 서러움과 수치스러움을 느꼈던 이유와 섭식장애 전문 상담사를 찾으려는 노력은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두 가지 마음 다 <내 아픔과 슬픔에 대해 너희들이 얼마나 아느냐>에 대한 처절한 마음 아닐까. 내 슬픔을 공감받고 내 아픔의 깊이를 온전히 이해받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일 거라 생각한다.
나에게 '헉'소리가 날 정도로 말랐다고 하면 나는 안심한다. 내가 마른 만큼 아파 보이는 걸 테니까. 내가 얼마나 아프고 힘든지 말로 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것 같아 그런 말들이 좋았다.
자해나 흉터의 정도를 보려 하는 사람들은 내 아픔을 다 모를까 봐 (이미 충분히 심각하다고 생각할 흉터들을 가졌음에도) 내가 얼마나 아픈 나날들을 보내왔는지 흉터 하나로 모든 걸 평가할까 봐 억울하고 서러웠다. 나는 이렇게 아픈데 그걸 평가하고 범주에 분류하고 내 말은 믿어주지도 않을까 봐, 들어주지도 않을까 봐 말이다.
섭식장애는 어떠한가?
알려진 섭식 장애자의 수치만큼이나 숨어있는 환자들이 많은 이유처럼 섭식장애는 그 장애를 지녔다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움을 품게 된다. 먹토나 폭토를 하는 분들은 더 깊게 숨어 지내신다. 섭식장애를 앓으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욕구를 평범하게 해내지 못한다는 것에서 이미 자존감이 심각하게 훼손된다. 어디에 맘 편히 말할 수도 없는 장애, 그러나 고통은 나날이 커지는 장애, 작은 고백조차도 손가락질을 받는 장애, 상담사에게 조차 상처 받을까 주저하게 되는 마음. 섭식장애의 무서움을 아는 사람들은 이런 감정들을 아주 잘 알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섭식장애 전문 상담사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환자는 너무도 고통스러운데 사회에서는 환자에게 죄책감을 심어주니까 말이다. 아무도, 심지어 의사나 상담사마저도 나를 이해해줄 수 없을 거란 불신이 생겨난다.
그럼에도 나는 알고 있다. 이미 내 흉터 하나하나가 전부 나의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의사나 상담사에게 꼭 필요한 자료고 그것들이 나를 옳은 길로 인도할 것이며 아무도 내가 꾀병 부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당장 섭식장애 전문의가 아니더라도 아무도 우리를 죄인으로 보지 않는다. 섭식장애의 고통이 얼마나 대단한지, 얼마나 처참하고 비참하여 살아있는 송장 같은지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전문성을 믿는 것은 오로지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오고 가는 장면에서 받는 상처는 누구와의 관계에서라도 생길 수 있는 일이니까. 그것을 말로 꺼내 상담사와 대화할 수만 있다면 문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섭식장애 전문 상담사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겠지만 과거력이 있는 상담사라면 그것만으로 위험의 요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결국은 다 장단점이 있는 상황. 그렇다면 갖가지 이유를 들며 자신의 치료를 미룰 것인가? 부딪쳐보겠는가?
다만 나의 흉터를 보며 신기해하고 섭식장애로 겪는 일들을 마치 재미난 이야기를 듣는 태도로 일관하는 상담사만큼은 피하자.
이해받고 싶은 만큼 내가 나를 안아주자. 괜찮다고, 그랬구나 하고, 얼마나 힘들었니 하고, 끊임없이 이해해주고 내 마음의 소리를 들어주자.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