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또 언제 북극에 와보겠는가
모스크바에는 아직 눈이 쌓일 정도의 추위는 아니었지만 슬슬 겨울이 다가오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시기가 되었다. 내가 모스크바에 처음 발을 들인 계절이 다가온다. 처음과 끝이 만나는 느낌. 무언가 마무리되는 느낌이다.
러시아에 와서 처음 계획한 것들 중에 이루지 못한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북극권의 도시, 무르만스크에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얼마나 추울 것인가에 대한 공포가 있었지만 그래도 내 일생에 언제 또 북극 가까이에 가보겠냐는 마음에 용기를 내어 결정했다.
비행기로 세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만날 수 있는 북극이라니! 어린시절 사회과부도에서나 보던 지역을 드디어 가보게 되었다.
밤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무르만스크 공항에서는 가득 쌓인 눈을 볼 수 있었다. 도시의 첫인상은 춥지만 상쾌한 공기 덕분에 매우 긍정적이었다. 그렇게 북극권에 내 발자국을 찍게 되었다.
무르만스크의 본격적인 시내 관광이 시작되는 날, 우리는 알료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거대한 석상을 만나러 갔다. 2차세계대전 당시 무르만스크는 소련으로 미국의 지원물자가 들어오는 중요한 항구였다. 냉전시대때야 소련과 미국이 적대국이었지만 2차세계대전 당시에는 추축국에 맞서 어깨를 맞대고 같이 싸우던 우방이었다. 미국은 당시 동부전선을 담당했단 소련에 많은 지원을 했다. 이러한 미국의 지원을 끊기 위한 나치 독일의 공격이 이 도시에 이어졌지만 무르만스크는 끝까지 살아남았고 당시 전사했던 병사들을 기리기 위하여 이 석상이 세워졌다. 영웅들의 도시라는 칭호와 함께. 석상 자체도 웅장했지만 석상의 시야에서 바라본 무르만스크 자체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눈에 덮인 자연 안에 감싸인 항구 도시는 추위에도 얼어붙지 않고 활기를 띄고 있었다. 무르만스크는 전쟁 이후에도 러시아의 산업 분야에서 영웅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르만스크는 북극권에 위치해있지만 비교덕 따뜻한 해류가 지나는 덕분에 겨울에도 잘 얼지 않는 항구이다. 그러나 그것은 항구의 이야기이고 항로 상에는 얼어있는 바다를 뚫고나가야 하는 일이 많이 있는 모양이다. 이른바 아이스브레이커, 쇄빙선이 필요할 일이 많은 곳이다. 무르만스크 항구쪽에 가면 거대한 체급을 자랑하는 쇄빙선들을 만나볼 수 있다. 쇄빙선을 실제로 보았을때 기분은 저정도 규모는 되어야 얼음을 뚫고갈 수 있겠구나였다. 어린 시절 우리나라의 쇄빙선 아라온호가 얼음을 깨며 항해하는 영상을 본 기억이 있어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쇄빙선들의 활약 때문인지 무르만스크는 매우 생동감 있는 항구가 되었다. 철도와 연계한 물류의 중심지로 각광받는데 특히 석탄 운송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한다.
항구도시인 만큼 생선을 파는 가게들도 많은데 가공된 느낌이 아닌 항구 시장 날 것의 느낌이다. 막상 파는 것은 펄펄 뛰는 생물 생선이 아닌 러시아식 말린 생선인 오믈이나 냉동 생선 등이 주류여서 아쉬웠다. 막상 생선을 먹고 싶어도 파는 식당이 많지 않아 더 아쉬웠고.
이미 북극해를 눈에 담았는데 싱싱한 해산물이 먹고 싶었지만 마땅한 식당이 없었다. 이래저래 점심을 먹을 식당을 찾던 중 찾아낸 것은 스테이크 하우스였다. 꽤나 오래전부터 구독해 온 유튜버님의 영상에서도 나온 곳이라 매우 반가우면서도 성지 순례를 하는 느낌으로 방문했다. 좋은 분위기에 서서히 기분이 고조되었고 요리가 나오니 생선은 생각도 안났다.
우선 주문한 것은 그날의 추천 요리인 소혀 구이와 그에 곁들여진 감자 퓨레 그리고 베이컨과 감자로 맛을 낸 치즈 스프였다. 소혀는 일본에서도 많이 먹지만 러시아에서도 꽤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요리이다. 부드러운 식감과 더불어 부속고기에서 느껴지기 쉬운 누린내가 없어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이 날의 주인공은 바로 립아이 스테이크였다. 부드러운 육질과 달콤한 지방의 조화 그리고 딱 좋은 익힘 정도 모든게 어우러져 입안에서 녹아내렸다. 배가 부른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늦은 밤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향하던 도중 우리 부부 모두 그 스테이크가 생각났다. 스테이크 하나 더 시킬걸. 우리 부부에게 러시아에서 가장 맛있는 스테이크집은 무르만스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