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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짐은 붕대에서 나온다

복싱 어때요

by 김호누

이전 글에서 나는 복싱이 멋있어 보여서 시작했다고 했다. 그리고 멋은 뭐니 뭐니 해도 핸드랩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미디어 속 복서들은 모두 손에 붕대를 두르고 있었다. 특히 학창 시절 노래방 화면에는 주인공이 링에 걸터앉아 손에 붕대를 감는 장면이 자주 나왔다. 왜 하는지는 몰라도 그 붕대 감은 손이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


첫날 줄넘기를 마치자 코치님이 새 붕대를 꺼내며 링에 걸터앉아 보라고 했다. 준비물은 체육관에서 살 수도 있다고 들었지만 혹시 비싸게 팔까 봐 집에 있던 의료용 붕대를 챙겨갔다. 너덜너덜한 붕대를 보고 당황했을 법도 했지만, 코치님은 티를 내지 않으며 바닥에 붕대를 탁 펼쳤다. 코치님은 정권과 손목을 보호하려면 운동용 핸드랩이 필요하다고 설명하면서 손목과 너클에 어떻게 감는지 보여주었다. 이게 그 복싱 붕대구나. 어릴 때 그렇게 폼나 보이던 걸 내가 하고 있구나.




주먹을 쥘 땐 손목이 안으로 살짝 말리게 하고, 팔과 손등을 일직선으로 맞춘다. 그 상태에서 튀어나온 검지와 중지 너클로 가격한다. 손목과 너클을 보호하려면 손가락 사이를 지그재그로 오가며 손등과 손목까지 단단히 감는다. 뜨개질 경력자인데도 감는 순서가 헷갈렸다. 집에서 몇 번을 다시 풀면서 연습했지만, 체육관에서 혼자 자연스럽게 감을 수 있게 되기까지는 일주일이 걸렸다.


핸드랩 위에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을 치다 보면 글러브 안이 금세 촉촉해진다. 나는 손에 땀이 없는 편인데도 그렇다. 그래서 운동을 아무리 대충 한 날에도 핸드랩을 잘 말리지 않으면 강아지 발바닥 같은 구수한 냄새가 난다. 처음에는 운동 후에 매번 빨아도 되는 건지 몰라서 일주일 내내 한 개를 말려가며 썼다. 결국 주말에 건조기까지 돌렸더니 핸드랩이 쪼글쪼글해졌다. 팽팽해야 손에 잘 감겨서 다림질까지 했다. 연애 초반에나 부릴 법한 정성으로 길이 4m짜리 두 개를 열심히 다렸다.


안 바쁠 때는 일주일에 다섯 번 출석하기도 해서 핸드랩 여분이 필요했다. 쿠팡에서 제일 싼 제품을 1+1으로 샀다. 새로운 취미를 시작해도 금방 싫증을 내는 편인데, 핸드랩을 사면서는 이번엔 오래갈 거란 예감이 들었다. 세 쌍을 한 달 동안 돌려쓰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세탁은 스킵하고 다림질만 했다. 다림질을 하면 스팀 소독과 탈취를 하는 셈이니 세탁까지는 과한 것 같았다.


집에 옷걸이 겸용 턱걸이 기구가 있다. 운동을 마치면 촉촉한 핸드랩을 거기에 걸어 축 늘어뜨려 놓는다. 그러면 주름 없이 잘 마른다. 그렇게 쓰다가 가끔 셔츠를 다릴 때 곁다리로 핸드랩도 다려준다. 소모품인데도 다림질까지 해주는 나 자신을 보면, 복싱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싶다.




설재인 작가의 『어퍼컷 좀 날려도 되겠습니까』에서, 그는 두 달쯤 지나 주먹에 힘이 실리면서 너클이 까졌다고 한다. 샌드백을 열심히 치면 너클이 까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솜주먹이어서 그런가, 내 너클은 1년이 넘도록 깨끗하다. 솜주먹이어도 핸드랩은 꼭 한다. 이제는 뭐든 조심해야 하는 나이어서 보호구는 필수다. 30대 중반이 되니 그냥 앉았다 일어나도 발목을 삐고 스트레칭하다가 어깨에 담이 걸린다.


무엇보다 핸드랩을 감아야 복싱하는 기분이 난다. 회사에서 손을 잘못짚어 손목 염증이 심했던 적이 있다. 한 달 동안 샌드백은 못 치고 섀도복싱만 했다. 타격 없이 허공에 섀도복싱만 할 거니까 시간도 아낄 겸 핸드랩을 생략해 봤다. 하지만 영 기분이 안 났다. 맨주먹의 거울 속 내 모습은 와이셔츠 없이 재킷만 걸친 듯 어색했다.


퇴근 후 넋이 나가 있다가도 복싱장 구석에 주저앉아 핸드랩을 감기 시작하면 ‘아, 나 복싱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핸드랩을 감아야 비로소 복싱할 준비가 된다. 복서의 기본 착장은 핸드랩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언제든 체육관에 들를 수 있도록 노트북 가방에 여분 한 쌍을 넣어 다닌다. 요즘엔 마는 게 귀찮아서 그냥 가방에 구겨 넣긴 하지만, 돌돌 만 핸드랩 한 쌍이 가방에 들어 있으면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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