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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과 30초의 마법

복싱 어때요

by 김호누

체육관 전면에는 거울이 있고, 그 중앙에는 디지털 타이머가 달려 있다. 타이머는 규칙적으로 "띵-" 하고 울린다. 내가 복싱장에 가서 제일 많이 하는 건 운동보다 타이머를 보는 일이다. 운동할 땐 힘들어서 쉬는 시간까지 몇 초 남았는지 보고, 쉬는 시간에는 얼마나 더 쉴 수 있나 확인하려고 본다.


1라운드는 3분이고, 공이 울리면 30초 동안 쉴 수 있다. 라운드가 끝나기 30초 전에 타이머 태엽 감기는 소리가 나고, 정확히 3분이 되면 "띵-" 하고 공이 친다. 휴식 시간 30초가 끝나기 3초 전에도 태엽 감기는 소리가 나고, 다시 3분이 세팅되면서 공이 울린다.


요즘 이 3분이 내 하루 중 제일 긴 3분이다. 시간이 너무 빠른 것 같으면 플랭크를 하라는 말이 있다. 그러면 시간이 아주 천천히 갈 거라고. 나한테는 플랭크보다 더 시간이 안 가는 게 줄넘기 3 라운드 중 첫 라운드이다.


이제는 처음보다 체력이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뛰기 시작한 지 30초가 되면 숨이 차면서 팔다리에 피곤함이 몰려온다. 남은 게 30초여야 할 것 같은데 뛴 게 고작 30 초라니. 50초, 1분 20초, 1분 30초. 시간이 너무 안 가서 땅만 보며 줄넘기를 한참 한 후에 고개를 들면 이제 막 2분 10초를 지나고 있다. 분명 공이 울릴 때가 된 것 같았는데.


그에 비해 쉬는 시간 30초는 정말로 눈 깜박이면 끝난다. 심호흡 세 번이면 30초가 지나있다. 산수를 해보면, 30초를 6번 모은 게 3분이니까 심호흡 3번씩 6번, 총 18번만 하면 1라운드가 끝나야 하는 것 아닌가? 18번은커녕 숨을 180번 정도는 헐떡여야 3분이 끝난다.




등록하고 첫 한 달은 타이머를 자주 무시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몸이 도저히 따라갈 힘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 1학기에는 수업 시간과 쉬는 시간 구분이 잘 안 된다고 한다. 쉬는 시간이 있긴 하지만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도 수시로 화장실을 가기 때문이다. 이때는 내 체력이 초등학교 1학년 집중력보다 낮았다.


그런 내가 체육관에서 시계를 노려보지 않는 때가 두 경우 있다. 첫 번 째는 핸드랩을 감을 때이다. 줄넘기를 마치고 섀도복싱을 시작하기 전에 구석에 앉아서 최대한 천천히, 꼼꼼히 핸드랩을 손에 감는다. 서서 멍 때리며 쉬면 코치님이 "왜 안 하세요!"하고 잔소리를 하기 때문에 핸드랩을 감을 때가 공식적으로 잔소리 없이 쉴 수 있는 때이다. 하지만 아무리 늦장 부리며 감아도 희한하게 항상 한 라운드 밖에 안 지나있다.


두 번째는 엔돌핀이 폭발할 때이다. 체력이 아무리 좋아졌어도 샌드백을 3라운드 치고 나면 슬슬 집에 가고 싶다. 그런데 가끔,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샌드백을 계속 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긍정 호르몬이 통각을 마비시키나 보다. 그럴 때는 공이 울리는 소리도 안 들리고 글러브가 샌드백에 붙었다 떨어지는 감촉만 느껴진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건 하지 않아도 되는 싸움이다. 3분이고 뭐고 그냥 무시하고 쉬엄쉬엄 하면서 코치님 잔소리만 잘 흘리면 된다. 코치님이 나이 서른 넘은 성인 회원에게는 중학생에게 하듯이 강제로 버핏이나 스쿼트를 시키며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럼 거기서 땀을 뻘뻘 흘리며 멈추지 않고 샌드백을 치는 성인들은 뭐지? 대회를 준비 중인가? 아니. 선수를 준비 중인가? 아니. 스스로를 단련하는, 복싱이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과 1년 넘게 섞여 있었더니, 나도 그 사람들 중 하나가 됐다. 표정은 심한 욕을 하고 있는 것 같긴 해도, 공이 울릴 때까지 꾸역꾸역 견딘다. 사랑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고 했다. 복싱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한 라운드도 못 버티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3분 속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 내 체력에 맞게 시간을 줄여줘도 좋겠지만, 더 좋아하는 쪽이 맞추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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